잔뜩 흐리고 무거운 하늘이다. 살짝만 건드려도 비를 쏟아낼 것 같다. 해가 없는 날의 흐린 윤곽처럼 몸도 선명하게 깨어나지 않는다.
두루루. 휴대폰 진동이 메시지가 왔음을 알린다. 스리랑카 출신 스님 S상에게서 사진이 한 장 도착했다. 청포도색의 매실이다. 단단한 매실 알맹이가 종이봉투에 한가득 담겨있다. 아침에 갓 딴 매실이라고 한다. 기분 좋은 청량함이다. 이내 강한 빗소리가 들려온다.
매실이 비를 불러온 듯하다. 교토는 지난 월요일(6월 둘째 주)부터 장마가 시작됐다.
장마는 일본어로 '쯔유'라고 발음하고 '梅雨'라고 쓴다. 그대로 풀이하면 '매실비'이다. 매실이 익어가는 동안 길게 내리는 비가 '장마'이다. 이제 6월에서 7월에 걸쳐 몸을 무겁게 하던 비는 푸른 매실이 되었다.
비와 관련된 표현은 꽤나 풍성하고 구체적이다. 대기도 대지도 비교적 습할 정도로 물이 많고, 농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탓에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일 것이다.
'매실비'로 불리는 장마의 다른 이름은 '5월비(五月雨)'이다. 음력 5월은 양력 6월 즈음이니 옛사람들에게 장마는 '5월비'가 되었다. 자연에 시간성과 생활이 꾸밈없이 들어가 있다.
비와 관련된 표현은 생활적이기도 하지만 낭만적이기도 하다. 한자의 조합과 예상을 벗어난 발음이 그러하다. 가령 장마(梅雨)는 '우메(梅, 매실)'와 '아메(雨, 비)'의 조합으로 '우메아메'나 '우메사메'로 발음될 것 같지만 '쯔유'라고 발음한다. 이는 이슬(露, 쯔유)과 같은 발음이다.
'5월비(五月雨)' 역시 '고가츠(五月, 5월)'와 '아메(雨, 비)'의 조합으로 '고가츠아메' 나 '고가츠사메'를 기대하지만, '사미타래'라고 발음한다. '사미타래'가 된 연유는 모르겠으나, 규칙을 벗어난 발음은 일상보다 촉촉하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시구래(時雨)'나 '유우다치(夕立)'라는 표현도 좋아한다.
'시구래(時雨)'는 늦가을부터 초겨울에 걸쳐 오락가락하는 가랑비이다. 우리말로 바꾸자면 '시우'나 '시절비' 정도가 될까. 그때가 되어야 내리는 비. '비'는 '시간(時)‘과 만나는 순간 어느 한 시절과 아련함을 잉태한다. 그래서일까. '시구래(時雨)'는 일본의 고전 문학이나 하이쿠*에도 종종 등장한다.
* 하이쿠 : 5·7·5 음절로 구성된 총 17음절의 일본 전통 단시(短詩)로,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를 반드시 포함하며, 자연·계절·인간의 감정 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유우다치(夕立)'는 여름 해질녘 요란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이다. '해질 무렵 일어나는 그 무엇'은 국민학교때 교과서에서 읽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떠올리게 한다. 소년의 마음이 내 마음에 물 웅덩이를 남겨 놓은 탓일까. 그때 이후 나는 여름의 소나기에 이유 없이 마음이 뛰고 슬픔을 느낀다.
S상은 매실 사진과 함께 그가 거주하는 사찰 주변의 숲에 쏟아지는 강한 비와 빗소리를 담아 보냈다. 그리고 팔리어(붓다의 설법이 구전된 언어)로 읊는 아침의 기도를 보내왔다. 노래와 같은 그의 기도가 빗소리와 함께 집 안을 채운다.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의 평화와 마음의 평화를 소원했을 것이다.
時雨るるや
鉄砲の音の
湿りつつ
<山口 誓子>
시우 내리는 소리
총소리조차
눅눅해지는 듯
<야마구치 세이시>
시우(시절비)가 내릴 즈음엔 세상의 총성이 멎기를, 주룩주룩 내리는 장맛비를 바라보며
나도 잠시 소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