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참소리박물관-솔숲-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아르떼뮤지엄-경포생태저류
동해에는 거친 바다뿐만 아니라 잔잔한 호수도 있다. 물이 거울처럼 맑아 ‘경포’라는 이름이 붙은 경포호수가 대표 선수다. 에너지 넘치는 파도를 즐긴 후에는 아기자기한 잔물결을 눈에 담고 한 걸음씩 걸으며, 마음을 들여다볼 차례다.
경포는 강릉의 매력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잔잔한 호수와 유려한 태백산맥의 능선, 소나무 숲과 누각이 어우러진 풍경 덕분에, 경포호 죽변을 어슬렁거리기만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호수 근처에는 볼거리와 이야기도 쌓여있다. 주변 명소만 살펴보더라도 강릉의 과거와 현재를 만난다. 경포호 둘레는 약 4.5km. 한 바퀴 산책하는데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지만, 이야기를 쫓아가다보면 산책 시간은 한없이 늘어난다.
경포호는 바닷물이 내륙으로 들어왔다가 모래를 밀어 만든 석호다. 옛날에는 경포호 둘레가 12km나 되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흙과 모래가 흘러든 데다 농지를 만들기 위해 땅을 개간해 지금은 약 4.5km로 줄었다. 과거 경포호의 크기는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포의 둘레가 20리고, 물이 깨끗하여 거울 같다. 사방이 깊지도 얕지도 않아 겨우 사람의 어깨가 잠길 만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경포호는 오랫동안 시인들의 마음을 듬뿍 받아왔다. 조선 시대 송강 정철은 경포호에 비친 달은 아름다워 《관동별곡》에서 ‘경포호에는 하늘, 바다, 호수, 술잔, 그리고 임의 눈동자, 다섯 개의 달이 뜬다’고 노래했다.
묵객들은 주로 누정에 앉아, 자연을 감상하고 시를 썼다. 그래서 경포호에는 경포대를 비롯해 방해정, 해운정, 호해정, 취영정 등 누정이 여럿이다. 지금은 호수 면적이 줄어, 호숫가가 아닌 곳에 있는 누정도 있지만, 누정에 올라 호수를 감상하던 옛 선조들의 정취는 상상할 수 있다.
산책의 출발은 경포대(鏡浦臺, 보물 제2046호). 경포대는 신라 화랑이 유람하면서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고려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명승으로 사랑받았다. 경포대의 ‘천하제일’이라고 쓰인 현판 아래 서면 고요한 호수와 멀리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누정이 단순해 주변 경관이 더 빛난다. 자연 환경과 조화를 고려해 누정을 세운 선인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이곳에서 다섯 개의 달을 보았을 시인 정철을 상상하며, 경포의 새로운 랜드마크인 스카이베이호텔을 바라본다. 과거와 현재가 한 자리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경포대에서 내려와 호수를 따라 걷는다. 산책로 바닥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차가운 바람은 상쾌하고 지저귀는 새 소리는 싱그럽다. 자연이 쉬고 있는 겨울이지만, 발걸음만은 봄처럼 가볍다.
얼마 걷지 않아, 왼쪽에 눈길을 끄는 건물이 등장한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오디오 전문 박물관인 참소리박물관이다. 에디슨이 1877년 발명한 축음기인 유성기 1호(틴호일)를 비롯해 17개국에서 제작한 1400여 점의 축음기를 비롯해 음반 15만 장, 음악 관련 도서 8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을 지나 걷다보면, 스카이베이호텔이 거대한 벽처럼 나타난다. 호텔을 지나면, 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경포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잠시 산책로에서 벗어나 바다를 만끽한다. 해변에는 각양각색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어, 마치 야외 미술관에 온 것 같다.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걷고 나면, 탄탄한 산책로의 길이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바다와 다른 호수로 눈길을 돌린다. 겨울의 경포에는 철새가 주인공이다. 호수 가운데 서 있는 월파정 주위로 철새 가족이 오손도손 날아다닌다. 월파정은 경포호 안에 솟은 작은 바위에 있는 누각으로, 경포호의 상징이다. 벤치에 잠시 앉아 철새들의 귀여운 곡예놀이를 감상하다보면, ‘시간이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경포대에서 출발해 호수 둘레를 반쯤 걷고 나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등장한다. ‘솔향강릉’이라는 강릉의 슬로건이 생각나는 공간이다. 호수 옆이지만, 마치 대관령 소나무 숲에 놀러온 듯,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아기자기한 조형물이 곳곳에 설치 되어있어, 사진 찍기에도 좋다.
피톤치드가 나오는 솔 숲을 즐긴 후에는 잠시 밖으로 나가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쪽으로 향한다. 허난설헌은 여덟 살 때 쓴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라는 산문으로 주변을 놀라게 한 천재 시인이자,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나다. 남매의 작품과 자료를 볼 수 있는 기념관을 살핀 후, 근처 울창한 소나무 숲도 둘러본다. 호숫가 소나무 숲보다 더 키가 큰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고즈넉하게 산책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시원해진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근처에 있는 아르떼뮤지엄도 들른다.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관으로, 강원도의 특성을 살린 ‘밸리’를 테마로 12개 미디어 아트 작품을 볼 수 있다. 해변과 폭포, 동굴 등 감탄사가 쏟아지는 공간이 이어진다. 강렬한 영상과 감각적인 음향, 세밀한 향기를 통해 잊지 못할 환상 여행을 경험한다.
아르떼뮤지엄에서 나온 후, 출발 지점까지 다시 호수 주변을 산책한다. 고요한 호수와 푸른 하늘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진기한 전시도 좋지만 역시 마음을 다독여주는 건 자연이라는 생각이 스민다. 산책길 중간에는 시비가 이어지고, 홍길동 캐릭터 산책길,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등이 기다린다. 기념탑에서 5분 정도 걸으면 경포 둘레길 산책을 시작한 경포대가 나타난다.
경포호 둘레길 걷기를 마친 후, 좀 더 걷고 싶다면 해운정과 선교장도 들러보자. 겉은 소박하지만 안쪽은 세련된 조각으로 장식한 해운정(海雲亭)은 오죽헌(烏竹軒) 다음으로 강릉에서 오래된 건물이다. 선교장은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품고택으로, 국가지정민속문화재 5호로 지정되어 있다.
요즘 SNS에서 유명한 경포생태저류지도 근처에 있어 빠트리기 아쉽다. 이곳에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이 있어,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여름에는 새파란 잎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는 고동색 잎이 멋진 배경을 만든다. 산책하다 보면 유유히 유영하는 청둥오리와 원앙도 쉽게 마주친다. 경포의 역사로 시작한 둘레길 여행, 자연 속을 편안하게 걷다보면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채워진다.
[르무통 x 동해] 시리즈 작가 소개
채지형 여행작가
모든 답은 길 위에 있다고 믿는 여행가.
시장 구경과 인형 모으기를 특별한 낙으로 삼고 있다.
『여행이 멈춰도 사랑은 남는다』 『안녕 여행』 『여행의 힘』 『지구별 워커홀릭』 등 10여 권의 여행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