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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Mar 08. 2024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날개를 단 듯 사뿐히 

다시 걷는다면 부암동에서부터


나는 네가 다시 걸었으면 좋겠어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올리브그린)


처음 시선이 닿은 건 그들의 발이었어. 아니 길이었지. 아니 그 길 위를 걷고 있는 그들의 발이었달까. 나는 듯 가벼워 보이는 두 사람의 발이 정말 인상적이었어. 일부러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맞춘 것처럼 같은 쪽 발을 땅에 대고 있더라고. 긴 코트를 입은 마르고 길쭉한 남자와 동글동글하고 안경을 쓴 귀여운 여자가 딱 붙어서 콩코드 광장을 배경으로 걷는 사진이었어.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하는 건데?”

“함께 걷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아. 하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잖아. 나는 네가 다시 걸었으면 좋겠어.”


아무말 없이 맥주만 홀짝이는 A를 바라보며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사진을 처음 본 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라는 책에서였는데, 미술관 벽에도 붙어 있더라. Universe를 그린 김환기 화백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아내 김향안이라는 사람과 그들의 파리행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더라고. 한국에서 인정받던 40중반의 화가 남편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세계 예술계의 평가가 궁금했대. 파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정작 파리에 먼저 간 건 아내였어. 김향안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비자를 취득해서 남편보다 1년 먼저 파리에 도착해. 남편의 파리 적응기간을 최소화 시키려는 계획이었지. 1년 동안 집, 작업실 기본적인 걸 준비해두고 심지어 예술계 인맥까지 만들어놔. 대단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이 쉼표 없이 자신의 꿈을 그려나갈 수 있도록 한 거야. 나는 가끔 살랑살랑 걷고 싶어지면 콩코드 광장의 돌길 위에서 날 듯 걷는 그들의 사진을 떠올려. 그리고, 


“김향안 여사는 이상의 부인이었어.”

“시인 이상? 날개를 쓴 이상?”

“그래 그 이상.” 


A는 그제야 맥주잔에서 입을 떼고 반응을 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굵직한 두 예술가를 남편으로 두었다니 놀랄만도 하지. 김향안 여사의 본명은 변동림. 뜨거운 구애로 변동림과 결혼한 이상은 4개월 만에 동경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변동림은 이혼남 김환기를 만난다. 


“둘 다 엄청난 천재들이잖아. 천재들의 파트너였네.”


“맞아. 천재보다 더 영민한 사람이라 가능했겠지. 아무튼 여기서 환기미술관 가까우니까 꼭 한 번 가봐. 부암동 골목 골목도 걸어보고. 걸어야 나아, 사랑은 사랑으로 슬픔은 슬픔으로. 잃어버린 산책은 다시 산책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감싸는, 부암동의 골목


회사가 있는 파주출판단지 근처에 살아 자주 못 만나던 A가 다시 서울로 온 건 한 달 전이었다. 키우던 강아지 보리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난 뒤 A는 무엇보다 함께 걷던 길을 못 견뎌했다. 보리를 데리고 회사에 출근했는데, 그 덕에 매일 둘은 출퇴근 길을 함께 했었다. 보리가 떠난 뒤 길을 걸을 때마다 보도블럭에 보리 발자국이 환영처럼 보였다고 A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그러다가 한때 걷기 딱 좋다던 출퇴근길을 운전해 다니더니 아예 서울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 


“보리는 나의 김향안이었어. 파주라는 낯선 곳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건 보리 덕분이었지. 먼저 와서 걸어본 것처럼 나를 안내했거든.” 


기억난다. A가 파주로 가고 난 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길이 더 멋지다고 자랑을 했었다. 


새로운 집에서 다시 만난 A는 생각보다 씩씩해보였다. 발치에 놓인 물그릇도 밥그릇도 없는 A의 집은 어색했다. 강아지를 한번도 키워본적 없는 사람 같았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사실 괜찮지 않았다. 아닌척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김환기와 김향안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A는 갑자기 눈이 빨개져서 이빨을 꼭 깨물고 다시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갑자기 얘기가 왜 그렇게 전개되는 거야?”


“사진 속 그들처럼 신나게 걸을 일은 없을 거 같아. 이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길을 바삐 지나기만 하겠지.”


“그러다 너 나중에 보리가 못알아 봐. 같이 걸을 때 행복해하던 인간만 기억할텐데. 그러지 말고 다시 걸어. 혼자라도 걸어. 걷다보면 너의 김향안이 다시 나타나겠지. 너희 집에서 환기미술관 마을버스로 갈 수 있더라. 주말에 꼭 가봐!”


반려길의 시작은, 르무통 메이트 (올리브그린) 와 함께 


A가 출근한 뒤 나는 A의 집에서 나와 마을버스를 탔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가 걷고 싶어졌다. 친구에게 혼자 걸어도 쓸쓸하지 않을 산책길 하나 알려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마을버스는 세검정을 지나 부암동 언덕을 올랐다. 자하문터널의 윗쪽 주민센터 앞에서 내려 길을 건넜다. 환기미술관은 주민센터 건너편 골목 창의문 아래쪽에 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불쑥 찾아간 환기미술관은 리뉴얼 공사중이었다. 김환기와 김향안의 발맞춰 걷는 사진을 보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아침 공기가 알싸하게 남아 있는 고즈넉한 동네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일이니까. 미술관 앞은 액자 속 풍경 같았다. 


김환기 작가의 일생이 담겨있는 환기미술관


치밀하지 못한 나는 자주 문닫힌 미술관과 마주하곤 했다. 신기한 건 미술관의 문이 닫혀 있더라도 그곳을 찾은 시간이 무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미술관이라는 곳은 작품이 있는 건물 안쪽 뿐 아니라 그 바깥, 경계 너머 언저리까지 하나의 작품으로 경험하게 하는 신비로운 장소였다. 


환기미술관 안으로 들어가 김환기의 작품을 보지 못해도 누군가의 일생이 담겨 있는 그 공간을 지난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인생과 예술을 떠올리게 한다. 회색의 철문 안쪽 아담하고 고운 미술관과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김환기의 작품 속 푸른 점 같았다. 미술관의 벽에 잠시 기대어서 눈을 감고 푸른 점으로 작아진 A의 강아지 보리를 떠올리고, 푸른 점처럼 슬프던 A의 눈물을 떠올리고, 푸른 점으로 사라질 나의 하루를 떠올렸다. 오늘 부암동 골목골목 푸른 점 같은 나의 발자국이 남을 것이다. 김환기 선생이 바란 건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푸른 점이 미술관 밖으로 더 멀리 찍히는 것. 


이번 반려길 산책을 함께한, 나의 반려신발 르무통 메이트 (올리브그린)


한참 동안 환기미술관에 등을 기대 서 있다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랐다. 자하손만두가 보이고 창의문이 나타났다. 다음에 A와 함께 이 길을 걷다가 꼭 따끈한 만둣국을 먹어야지. 다짐을 하고 흘깃 창의문을 바라봤다. 나는 그 앞에 가면 문을 통과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커다란 성문앞 돌길을 몇 번이고 오고간다. 깨끗하고 반듯한 돌이 격자로 깔려 있는 길을 밟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아스팔트나 보도블럭과 전혀 다른 질감의 돌길은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온 느낌. 꿈을 찾아간 파리의 돌길 위에 떠 있듯 닿아 있는 김환기와 김향안의 발처럼 그 돌길 위를 오고가며 나의 걸음도 사뿐해졌다.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온 느낌을 주는 창의문


창의문을 넘어서면 윤동주 문학관과 청운공원으로 이어지는데, 보리를 잃은 친구에게 공원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길이 나을 것 같아 방향을 돌렸다. 


오랜 시간, 꾸준히 자리를 지켜온 클럽 에스프레소와 자하문 터널


창의문앞 삼거리로 향해 오래된 커피집 클럽에스프레소를 지나고 오밀조밀 작은 상점들을 지나 길을 건넜다. 

아직 오전인데 자하문 터널로 이어진 영화 <기생충>의 배경이던 계단 앞에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다. 부암동을 여러 번 다니면서 그 계단은 한번도 내려가지 않았다. 계단을 혼자 내려가는 건 어쩐지 쓸쓸하다. 다음에 A와 함께 온다면 그때 가봐야지. 


번잡한 도심 속, 여유를 선물하는 스콘 맛집 스코프


영화촬영지 대신 스콘 맛집 스코프에 들러 커피를 한잔 하며 버터스콘과 얼그레이스콘을 샀다. 집에 돌아가 향긋한 홍차와 함께 먹어야지. 


가방에 고소한 버터 냄새를 풍기는 스콘을 넣고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왔던 길을 걸어서 내려갔다. 걷는 내내 눈앞에 북한산이 펼쳐졌다. 우뚝 솟은 바위산 아래 오밀조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나는 괜히 왼쪽 골목으로 들

어가 경사가 높은 언덕길을 오르며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었을 집들을 구경했다. 


오밀조밀, 집들이 모여있는 부암동의 언덕


쉬운 길을 어렵게 걸었다. 그래야 A가 다시 이 길을 걸을 때 잠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할 겨를 없이 걷는 것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석파정을 지나 지하철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탈까 하다가 길을 건넜다. 늘 지나쳤던 탕춘대성의 성문 홍지문을 보고 가기로 했다. 오래된 성문 앞에서 사진을 찍어 A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탕춘대성의 성문, 홍지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문을 지났을지 상상해 봐. 그 사람들과 함께 지났을 수많은 슬픔과 기쁨을 생각해봐. 목련 몽우리가 예쁘다. 이제 곧 피어날 거 같아. 꽃이 피면 우리 함께 걷자. 김환기와 김향안처럼 사뿐하게.”


 




반려길이란?

길을 입양해서 가꾸며 평생을 돌보는 나의 반려길 프로젝트, 르무통이 시작합니다. 


*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주세요

댓글에 나만의 반려길을 소개해 주세요. 그 길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유, 길의 위치, 역사, 길에 얽힌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에디터 L씨가 그 길을 소개합니다. 매주 3명의 당첨자를 선정해 르무통 공식몰 적립금 5만원과 르무통 매거진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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