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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Jan 26. 2020

이향 / 밤의 그늘

밤만이 줄 수 있는 위로


밤의 그늘 / 이향

나무는 나무에서 걸어나오고
돌은 돌에서 태어난다

뱀은 다시 허물을 껴입고
그늘은 그늘로 돌아온다

깊고 푸른 심연 속에서
흰 그늘을 뿜어올리는
검은
등불

낮에 펼쳐둔 두꺼운 책갈피로 밤이 쌓인다
달의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다가 다시 펼쳐지는
밤의
정원에서

멀리 걸어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저 혼자 앉아 있는


이향 시집 <희다>, 문학동네, 2013


이 별에는 낮과 밤이 있습니다.

낮은 태양이 쏟아내는 빛으로 가득합니다. 그 환한 세계는 사물을 모조리 드러냅니다. 숨을 곳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물들은 내면을 감추고 가면을 쓰기로 했습니다. 나무는 나무를 입었고, 돌은 돌은 걸쳤고, 아무 소품도 없었던 뱀은 자신의 피부를 벗겨서 변장했습니다. 그렇게 낮동안 자신을 감추고 자신을 연기합니다. 착함을 연기하고 행복을 가장하고 낙천성으로 위장합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그늘을 숨깁니다. 그것이 드러날까 하루종일 전전긍긍. 낮의 시간은 너무 더딥니다.


밤은 빛의 그림자로 가득합니다. 그 어두운 세계는 사물을 감춥니다. 이제 숨을 이유가,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사물들이 하나 둘 가면과 위장을 벗습니다. 나무는 나무를 벗고, 돌은 돌을 내려놓고, 뱀은 아프게 벗었던 허물을 다시 껴입습니다. 그렇게 밤에는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밤은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두꺼운 책을 읽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저 가만히 감싸줍니다. 그리고는 달빛을 접고 피면서 아코디언을 연주합니다.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선율은 깊고 푸른 심연 같은 위로입니다. "멀리 걸어나와 다시는 /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저 혼자 앉아 있'고 싶은 밤의 시간은 애틋한 찰나입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자주 슬프고 늘 외로운 이유입니다. 동살이 잡히자마자 밤을 그리워하는 연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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