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Jan, 2011
'한때 주민의 한 사람으로 일상생활을 보내던 곳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여행자로 다시 방문하는 기분은 제법 나쁘지 않다. 그곳에는 당신의 몇 년 치 인생이 고스란히 잘려 나와 보존되어 있다. 썰물이 진 모래사장에 찍힌 한 줄기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 보고 들은 것, 그때 유행했던 음악, 들이마신 공기, 만났던 사람들, 주고받은 대화, 물론 개중에는 즐겁지 않은 일과 슬픈 일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좋았던 일도, 그다지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일도 모두 시간이라는 소프트한 포장지에 싸여, 당신 의식의 서랍 속에 향주머니와 함께 고이 담겨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한 개인의 인생이 형성되고, 인생의 서사가 쓰이는 것에는 많은 요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된다. 나에게 영국에서 보낸 19살부터 20대 초중반까지의 삶은 현재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었다. 2011년 1월. 영국에 폭설이 쏟아지던 그 해에 나는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10~11시간 뒤 도착한 런던 히드로 공항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오래되고 초라하고 정신없는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영국의 1월은 순간적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추웠고, 두려울 만큼 어둡고 차가웠다. 그렇게 추운 겨울에 히터 하나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삶의 형태는 평생 온돌방 문화에서 살아온 나에게 고역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화장실에 욕조까지 딸린 방에서 머물 수 있었고 씻고 쉬는 것만큼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해가 3시면 지는 영국의 겨울에 할 수 있는 활동은 제한적인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독서, 영화 감상, TV 보기 그리고 가족, 연인 혹은 친구들과 집에서 나누는 소소한 담소와 파티 그리고 사색을 즐기다 보니 놀라운 상상력을 기반으로 탄생하는 수많은 소설과 이야기들에 영국에서 만들어졌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날씨와 환경이 야외 활동을 제한하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게 되고, 조금 더 정적이고 조용한 일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그래도 1월의 영국은 아름다웠다. 하얗게 쌓인 눈과, 그 풍경 속 아늑한 집과 수많은 나무들, 그리고 겨울 전등 장식은 런던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나의 첫 호스트 패밀리였던 미셸의 집에는 그녀의 외동아들과 영국 고등학생이 살고 있었다. 영국 고등학생은 영국 지방에서 런던으로 혼자 올라와 발레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나보다 네다섯 살 어린 친구가 가족을 떠나 혼자 대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며 살고 있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는 자유 분방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여성스럽고 수다스러운 남동생이었다. 그와 집주인인 미셸의 관계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지만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평범한 조합이었다.
내가 영국 생활을 시작한 동네인 그곳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내가 등록한 어학원이 있는 동네의 중심부에 나가야지 그나마 유색인종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나와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 나라의 국민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당장에 영어를 쓰며 살아남고, 더 나아가 그 땅에서의 장기적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넘어야 할 산들을 넘어서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들이 나를 외국인으로 인지하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거나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상관없었다. 어쩌면 이러한 사회에서 배제된 위치가 나에게 더 큰 자유를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외지인인에 불과했다. 그렇게 현지인들과의 거리를 조절하며 외지인으로서 사회와 문화를 관찰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 특유의 자유를 누렸다. 그렇게 조금씩 적응하던 중 사귀게 된 친구들과 런던 곳곳을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매료되었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아.
그때 그 시절의 나는 런던에 매료되었다. 친절한 사람들과 고풍스럽고 화려했던 건물과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하며 런던을 사랑하게 됐다. 그렇게 런던과 사랑에 빠진 후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을 때 꼭 몇 년간 서로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며 연애를 한 애인과 헤어지는 기분이랄까.. 첫사랑이 그렇게 끝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에게 영국은 특별하고 찬란했다. 그렇게 거의 7-8년 만에 돌아온 런던은 떠날 때 그대로였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작은 피시 앤 칩스 식당도, 열정을 불태우며 웃고 울었던 학교의 캠퍼스도, 지난 7년간 브렉시트와 코로나 및 급변하는 정세와 경제, 어려운 정치적 상황을 겪으면서도 건재하게 서있던 수많은 역사적 건물까지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렇게 7년이란 시간 동안 나 혼자만 변화를 겪은 채 온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이곳에 방문하니 과거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오랜 시간 동안 나만의 서랍에서 꺼내 보던 추억의 장소들을 발이 닿는 대로 방문했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났고, 오랜 시간 연락만 하면 지내던 사람들과 몇 년에 한 번은 보고 지냈지만 그래도 항상 그리운 오랜 벗들을 만났다. 우리 모두 변해 있었다. 어리광 부리고 사소한 일로 울고 웃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과거보다 현재에 집중하며 미래를 만들어 내야 하는 치열한 사회인이었다. 그중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자신을 닮은 아이들과 가정을 꾸리기도 했으며, 전공과는 별개의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급속도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나의 추억을 간직한 채 우직하게 버텨온 나의 마음과 런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나 한 번쯤 고요한 새벽의 시간에 조용히 꺼내보는 기억의 상자가 있지 않은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의 내 모습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여행을 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