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나팍 Sep 13. 2023

계획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을 때

나는 J형 인간이다.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는 능숙하다. 꼼꼼하고 완벽주의를 지향하며 실행해서 성과를 내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목표를 이룬 후의 성취감을 좋아한다.


반면 내가 가장 부족한 자세는 '그러려니~' 마인드다. 어떤 상황이나 예기치 못한 일, 또는 계획한 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 조바심을 내거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또한 내가 옳고 타인이 틀렸을 때 유하게 흘려보내기 어려웠 유연성이 부족했다.


그런데 육아를 하다 보면 매일의 하루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육아는 언제나 예상밖 일의 연속이었다. 계획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인간 인내심의 한계를 확인하기도 했다. 육아는 내게 수양과 수련의 시기를 줌으로써 나도 모르게 부족했던 수용의 자세가 길러졌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타인을 포용하고 상황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생각한 대로 할 수 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린 자세가 조금씩 길러졌다.


얼마 전, 금요일 아이 병원을 예약해 두었다. 인기 많은 의사 예약이 가능한 날이자 내 근무 스케줄을 고려해서 휴가가 가능한 적당한 날짜로 예약했다. 그런데 수요일에 느닷없이 아이 등원거부를 했다. 평소 유치원에 잘 다니는 편이기 때문에 한 번씩 가기 힘들어하는 날엔 외출을 내고 천천히 등원을 하거나 받아주는 편이다. 수요일 아침, 눈을 뜨자 아이는 애절한 눈망울로 말했다.


- 엄마, 나 오늘만 유치원 안 가면 안 돼요??

- 오늘은 유치원 가고 금요일에 쉬고 엄마랑 병원 가고 놀자~ 오늘만 유치원 가면 안 될까?

- 오늘 딱~~ 하루만요. 네?? 제발요~ 오늘 딱 하루만 유치원 안 가면 안 될까????


보통의 나라면 설득을 하든, 화를 내든, 부탁을 하든, 조금 받아주다가 결국엔 예정대로 유치원에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 평소 찡얼거림과 달리 차분하고도 간절한 말투와 눈빛 담아 얘기했다. 그래서 짜증을 내기 전에 그냥 오늘로 연차를 바꾸자고 내 생각을 바꿨다. 기치 못한 일정에 등원 전쟁을 겪거나, 함성이 오가거나, 짜증이 밀려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빠르게 수용하고 아이 의견을 따랐다. 갑작스러운 연차라 마음도 조금 불편하고 병원 당일 예약도 불투명했지만, 겨우겨우 확인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6개월을 미뤘던 안짱다리로 인한 진료였고, 진료 결과에 따라 교정을 위한 맞춤형 깔창을 제작하기로 했다. 오전 진료를 받고 나자 간호사가 갑자기 얘기다.


- 오늘 마침 깔창 제작하는 박사님 오시는 날인데, 예약해 드릴까요? 4시 반이라 시간이 많이 남긴 했지만요

- 오, 정말요? 네! 예약할게요

- 이 분 대기가 길어서 이렇게 한 번에 받기 힘든데, 운이 좋으시네요. 오늘이 오시는 날이고, 마침 1분이 취소를 하셔서 한 자리가 비었어요. 안 그러면 몇 달 대기하셔야 하는데 잘되었네요!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깔창 제작 전문가는 한 달 한 두 번 오는 날이 정해져 있고, 예약 대기도 길어서 원하는 때 받기도 힘들다. 그래서 미리 날짜를 확인해서 진료받으려 했으나 초진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일단 진료 후 결과에 따라 예약하라고 안내받았다. 만일 내 계획대로 금요일에 왔다면 병원에 최소 2번은 더 간 뒤, 깔창 제작은 최소 1달 후에나 가능한 상황이었다. 뜻밖의 일들이 일어났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바꾼 날짜가 오히려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 덕분에 아이와 키즈카페와 미술관 투어를 하고 다시 병원에 가서 하루 만에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에 올 수 있었다.


일이 꼬였다고 생각했던 아침이 오히려 일이 술술 풀리게 되는 운 좋은 날었던 것이다. 때로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게 제일 좋을 때가 있다. 정성을 기울여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꼭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노력한 만큼 대가가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예기치 못한 순간들이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꼭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직장에 들어가기 전, 여러 번 탈락고배를 마셨던 순간들이 지나고 보면 감사한 일이 되었다. 슬픔에 잠겼던 순간들이, 오히려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해 준 고마운 사건으로 바뀌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갑상선 질병이 찾아왔을 땐, 고독하고도 우울하고 힘겨운 날들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건강'에 대해 난생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내 몸을 돌보지 않고 의욕만으로 살다 보면, 결국 내가 쓰러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부터 몸과 마음 건강에 관한 책도 읽고 관심을 가지면서 나를 돌보게 되었고 에너지의 적절한 안배를 생각하게 되었다. 만일 그날의 브레이크가 없었다면 더 큰일이 닥쳤을지 모른다. 위기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내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변화시킨 기회가 되었다.


좋은 게 꼭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꼭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이 조금씩 이해된다. 오늘도 내 몸에 너무 힘을 주고 살고 있진 않나 생각해 본다. 그럴 땐 움켜쥔 손을 펴고 몸에 힘을 살짝 빼보자. 화가 올라올 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이 불안해질 때, 잠시 멈추고 심호흡을 한다.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며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안정이 찾아올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눈부신 햇살을 듬뿍 흡수해 보자. 그리고 오늘 하루를 흘러가는 대로 맡겨보자. 구름 뒤에 눈부신 햇살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가 아프면 서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