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8세는 찬란할 줄 알았다. 대기업에 다니는 젊고 패기 넘치는 한 여성으로서, 적당한 급여와 만족스러운 직장생활로 경력을 차곡차곡 쌓으며 안정적인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을 줄 알았다. 주중엔 커리어우먼으로 일하고, 주말엔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떨며 적당한 온도의 즐거움을 누린다. 때론 데이트도 하고, 때론 여행도 다니며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되 자기 계발도 놓치지 않는 센스 있고 발전적인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돈도 어느 정도 모아 미래를 차곡차곡 준비하며 성실하게 일하는 직장인으로서의 삶, 거창하지도 원대하지도 않지만 가장 보통의 날들을 바랐다.
그러나 평범한 게 가장 어렵다고 했던가? 내 현실은 꿈꾸던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과 점점 멀어져 갔다. 힘들고 외롭고 지치게 만드는 예상치 못했던 직장생활의 모습은 나를 점점 잿빛으로 물들게 했다. 자아실현이란 단어를 저 멀리 밀어내보려고 애써봤지만 자꾸 그럴수록 내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딴 자아실현을 왜 찾아? 한가한 소리 하고 있네! 동기부여가 왜 필요해? 돈 받는 대로 일하면 되잖어? 그냥 남들처럼 살면 안 돼?' 라며 애써 생각해 봐도 소용없었다.
나만 눈 질끈 감고 현실에 적응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됐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이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 속에 주체적인 내가 없었고, 내 삶은 바다 위에 표류하듯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업을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느낄 수 없었으며, 보람도 당연히 없었다. 이런 가치들을 찾는 게 사치라고 치더라도 퇴사할 이유는 점점 명확해져 갔다. (전편) 대기업을 퇴사하고 싶은 이유
매일의 하루가 쌓여 인생이 된다고 했던가. 나의 하루만 놓고 봤을 때 그 안에 ‘행복’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없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30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30년 동안 나는 행복이 통째로 빠진 직장인으로 살게 될 것이며, 나의 존재 가치를 찾지 못한 채 은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미래를 생각하니 끔찍했다. 어떡하지? 여기가 제일 좋은 직장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만족할 수 없다면 난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하지?
꾸역꾸역 출근길로 옮기는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고민하고 번뇌했다. 매일 생각에 꼬리를 물고 방향을 찾다 보니‘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라는 철학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대답은 ‘지금 당장 무엇을 알아내진 못하더라도, 확실한 건 지금의 삶은 아니다’였다. 그 결론을 내리자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앞으로 누리게 될 달콤한 모든 유혹에서 벗어나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내 눈앞에는 무한한 자유이자 불안정성의 연속인 퇴사자의 삶이 새롭게 펼쳐졌다.
- 유럽? 왜 가는 거예요?
- 유럽에 가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지금이 그때인 것 같아요
20대 후반, 모두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1년의 공백기를 주기로 했다. 가장 불안하고 방황하며 돈도 없는 1년이 아닌, 어쩌면 내 길을 찾기 위해 가장 황금기가 될 수도 있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러나 남들 눈에는 2글자로 비칠 뿐이었다. '백수'영어로 표현하면 조금 더 위안이 되려나? 'between jobs' 나는 이렇게 내 신분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퇴사하며 1가지 다짐을 했다.
- 퇴직금을 전부 여행경비에 쓰기
이렇게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몇 년 간 직장생활을 하며 깨우친 게 있기 때문이다. 바로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학생 때는 방학도 있고 자유로운 시간이 많은 반면 돈이 없었고, 돈을 버는 직장인이 되자 시간이 없었다. 입사 첫 해에 내가 쓸 수 있는 여름휴가는 2일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직장인으로서 '해외 한 달 살기'와 같은 장기간 여행은 대부분 은퇴 후나 가능한 일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30년 동안 365일 일하지만, 30일의 휴가는 없는 삶! 현실이 파악되자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졌다.
지금이 아니면 해 볼 수 없는 것을 하자!
돈은 언제라도 다시 벌면 된다. 여행을 떠나는 최적의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스스로에게 무한의 시간을 선물한 바로 지금! 떠날 수 있을 때, 그리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자!
다른 욕심은 없다. 길 가다 아무 레스토랑에 들어가 그 나라 사람들이 먹는 걸 먹어볼 것이다. 맛없으면 어떠랴. 그래도 이게 그 나라 음식인걸. 새로 사귄 친구랑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밤새 수다도 떨어보고, 또는 파티도 즐겨보고,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걷고 또 걸어볼 것이다.
길을 잃어도 상관없다. 헤매는 그 길조차 그 나라인 걸. 그 속에서 그냥 그렇게 다녀보고 싶다.
새로운 세상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싶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이야기 나누다 보면 또 다른 시야가 열리고, 내 길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