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 다음으로 아기가 내뱉은 말은 '물, 우, 치'(물, 우유, 치즈) 같은 생존에 필요한 단어들이었다. 그러다 몇 달이 지나자 '맘마, 응가' 같은 어휘가 늘었는데 여전히 본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에 관련된 단어들이었다.
어느 날 아기가 부쩍 컸다고 느낀 순간은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아기가 나를 챙기고 있는 모습을 볼 때였다. 늘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응가를 씻겨주며 내 손을 거치지 않고는 무엇하나 할 수 없었던 아기가 고작 20개월이 지나자 엄마 아빠를 챙기고 있었다.
장난감 주방놀이를 하며 가스레인지 옆에서 '앗~뜨거워' 연기하자 아기가 갑자기 '조심조심~' 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내뱉는 것이 아닌가.내게 유사한 상황에서 늘 듣던 단어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아이의 입을 통해 튀어나온 것이다. 아기가 나를 걱정해주고 위로해주는 순간들이 불쑥불쑥 선물처럼 찾아왔다. 아기의 언어발달은 재밌고도 놀라웠다.
한 번은 육아하는 아빠가 아기에게 점점 주장이 생기자 "네이놈~!!"을 하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단어라고 말을 해도 남편은 효과가 좋다고 자주 사용했다
- 손부터 씻어야지!
- 싫어 싫어! 과자 줘~
- 네이놈~!!
- 이제 그만하고 잘 시간이야
- 아빠 놀아줘~~ 아빠 안아줘~~ 퍼즐 놀이할래
- 네이놈~!!
그러던 어느 날 아기가 아빠 손을 이끌고 장난감 놀이를 하러 가고 싶었나 보다
- 아빠, 빨리빨리~~가자 가자~~~
- 아이고~~ 알았어
아빠가 늦장을 피우자 아기가 하는 말
- 네 이놈!!!
아기는 아빠에게 때와 장소에 맞는 단어를 제대로 배운 것이다. 충격을 받은 아빠는 그 뒤로 '네이놈'을 쓰지 않았다.
아기가 뱉는 언어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부모로부터 배운 단어다. 한 번이라도 들어본 단어를 말하게 되고, 자주 들은 단어부터 내뱉는다. 그러니 아기의 언어를 보면 스스로 부모인 나의 언어 습관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어느 날 아기랑 책장 정리를 하고 있는데 뜻대로 잘 되지 않고 책이 와르르 쏟아져 버렸다. 그런데 울 줄 알았던 아기가 하는 말
다시 해보자
아기가 이 단어를 처음 내뱉는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짜증 날 법도 한순간에 처음으로 내뱉은 말 "다시 해보자". 아기는 너무나 당연한 듯 다시 하자고 말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기분이었다. 엄마도 다시 할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아기가 나를 독려하며 이끄는 순간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아기가 내게 건넨 '다시 해보자'는 말의 힘은 생각보다 강렬하고 위대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성인이 되고'괜찮아~ 다시 해보면 돼'라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주 어릴 땐 들었다. 성적이 낮게 나왔을 때 어머니는 혼낼 듯하시다가도 "다음번에 잘 보면 돼~"라고 너그럽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회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잘하지 못하면 '다음'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회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다음번엔 더 잘해~, 이게 최선이야?'같은 말들이었다. 당근과 채찍의 병행 속에 나의 업무 레벨은 점점 높아졌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거나 만족할만한 상황은 오진 않았다. 못하면 잘해야 했고 잘하면 목표치가 상향되어 다음엔 더 잘해야 했다.
다시 해보자 잘 못해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천천히 가도 괜찮아 넘어져도 괜찮아 우리 다시 해보자
그런데 아기가 내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다. 다시 해보자고 나를 일으키고 있다. 시도하고 또 시도하자고 한다. 못해도 괜찮고 무너져도 괜찮다고 말한다. 다시 해보면 되니까 말이다.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 너무 슬퍼하거나 멈추지 말자. 우리... 다시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