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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팍 Jan 20. 2023

회사가 불만일 때 소심하게 복수하는 방법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 여보, 망했어!



뭐가 망했다는 걸까? 경제적 부를 원하는 나로서는 뭐가 되었든 망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얘기한다



- 1월 00일에 이사장 오신대!!!!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을 기념해서 휴가 내고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갈 계획이었다. 이런, 눈치 없는 이사장 같으니라고. 하필 직원 부인 생일에 남편 사무실에 방문할게 뭐람? 본사에서 1년에 한 번 정도 오는 이사장이 왜 하필 내 생일 온다는 거야??? 이사장이 직원 부인 생일까지 챙길 이유야 당연히 없지만 날짜를 골라도 참 잘못 고르셨네! 그렇지만 별수 있나? 오시라고 허락하는 수밖에. 내가 오라 가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것밖엔 달리 방도가 없으니 포기도 빨랐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여행을 한 주 미루지 뭐.. 어쩔 수 없지^^



쿨하게 넘어갔다. 그런데 이건 서문에 불과했다. 내 생각이 짧았던 건가. 이사장 방문일 바로 앞 주말까지 출근할 건 예상했으나 그게 명절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며칠 뒤 남편에게 또 문자가 왔다.



- 1월 24일(명절연휴)에 출근하래!



오 마이 갓!!! 이건 못 참아!! 이사장 방문일정에 맞춰 회의자료부터 행사준비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건 알겠으나 그나마 이틀 쉬는 명절 중에 하루 더 출근을 하라고? 지금 남편더러 명절 연휴 동안 단 하루만 쉬라는 소리야?????!!! 남편 회사는 업무 특성상 스케줄제로 운영하며 주말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출근해야 하는 구조다. 그래서 빨간 날인 명절도 예외 없이 누군가는 돌아가며 출근해야 하고, 늘 명절은 전체 연휴기간 중 절반은 쉬고 절반은 출근하는 구조였다. 다른 평일에 대체로 휴무일을 주지만 그건 명절에 다녀간 가족들이 다 떠난 후의 휴일일 뿐이었다. 이번 명절 역시 연휴기간 4일 중 2일은 출근이고, 2일은 쉬는데 그 쉬는 날 중 하루 또한 이사장님 방문 회의자료 준비 때문에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1년 만에 온 가족이 모이는데 출근 때문에 하루만 보는 건 너무하잖아!!!


나는 당장에 대답했다.


- 이사장님 센스가 진짜 왜 그래?? 명절이 낀 주는 피했지만 명절 직후에 오시니까 지금 명절 내내 회의자료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직원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걸 모르고 날짜를 왜 그렇게 잡으신 거야? 정말!!!


남편도 속상해했다. 방문일까지 최소 휴가 3일을 반납하고 출근해야 하며, 명절까지 추가로 출근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나의 논쟁은 MZ 세대의 직장문화까지 이어졌다.


- 요즘 MZ 세대가 이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주말 출근도 싫어할 텐데(평일 휴무보장이지만) 명절까지 출근해야하는 회사를 누가 받아들이겠냐고? 하.. 정말!!



나는 안다. MZ세대에게 주말 휴일 보장은 급여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안다. 이사장이나 관리자급에 있는 분들은 주말까지 반납하며 회사에 헌신하며 일해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이 당연히 그래왔던 것처럼 후배 세대들도 그래주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일정과 회의 준비를 위해 빨간 날이 든 검정날이든 상관없이 소집하는 것일 테지. 하지만 신입사원일수록 이 사실을 절대 못 받아들일 것이다. 윗세대, 요즘 세대, 그리고 우리처럼 낀 세대. 그 모두가 각자의 고충이 있다. 각자의 생각도 다르다. 로의 생각을 교과서처럼 책으로 배워서 읽어야 할 정도로 다르다. 신입사원들은 바뀌어가는데 조직문화는 그와는 다른 속도로 더디게 변화하나 보다.


나의 10년도 더 된 기억이 떠오른다. 주말을 회사에 반납하며 워커홀릭으로 열심히 일했던 팀장님과 선배님들이 신입사원인 내게 주말 출근을 종종 권유하셨다. 말이 좋아 권유지, 은근한 강요라고나 할까? 바쁠 때, 일이 많을 때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건 이해한다고 쳐도 굳이 나올 이유가 없는 주말에 도대체 내가 왜 나와야 한단 말인가? 주말에 내가 할 게 얼마나 많은데!!!!


- 00 이는 주말에 주로 뭐 하니?


갑작스러운 선배의 질문에 주말마다 정말 버라이어티 하게 재미나게 놀고 있는 내 일상을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머리가 멍해졌다. 지난주는 강원도로 동기모임을 다녀왔고, 지난번엔 공연을 보러 갔고, 지난번엔 고향에 다녀왔고, 지난번엔 밤새도록 친구들과 놀았고, 지난번엔 여행을 다녀왔고.. 또..... 뭘 했더라? 확실한 건 회사가 있고 내가 거주하는 도시에는 잘 없었고 들로 산으로 놀러 다녔다. 나는 떠오르는 추억들을 뒤로하고 대충 둘러댔다.


- 음.. 집에서 그냥 책 봐요~

- 그래?? 주로 무슨 책 보는데?

- 그냥 이것저것요


- 그럼 한 번씩 회사에 나와서 책도 보고하면 어떨까? 자기 발전도 되고 말이야.


'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세요?'라고 당장에 외치고 싶었다. 책은 집에서 침대에서 편하게 누워서 봐야지 내 멀쩡한 집에 책상과 침대를 놔두고 공기마저 숨 막히는 회사에 나와서 왜 책을 봐야 한단 말이야? 게다가 사실은 책 보는 것도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인데. 기가차고 코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선배들처럼 주말까지 반납하며 회사에 헌신하도록 길들여지고 싶지 않았다. 고삐가 있다면 절대 그 고삐를 차지 않고 주말만큼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니 그 시기, 말 안 듣는 신입사원인 나를 길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는 직장인으로 굽신거리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월급의 노예로 살고 있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 일 폭탄과 출근이 예된 남편 또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괜히 싫은 소리 했다가는 더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나 역시 '그깟 보고자료가 뭐라고? 그깟 월급이 뭐라고?'라고 큰소리쳤지만 명절 상여금이 들어오지 않는 텅 빈 통장을 몇 번이고 업데이트했다. 바닥에 가까운 통장잔고를 보면서 회사가 주는 급여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이게 들어와야 명절을 보낼 수 있는데....' 겉으로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만 당장에 급여 없이는 안 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다.


집에 온 남편은 탁자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내가 도서 트렌드 분석을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다. 제목이 마침 딱이다. 이 책을 발견 한 남편은 시무룩했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 이걸 회사에 갖다 두는 거야! 내 책상 위에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는 거지!!!

- 그래!!!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야!!! 퇴근할 때마다 책상 한가운데에 떡하니 놔둬!!!! 누구라도 오가면서 볼 수 있게 말이야!!!!



나는 안다. 남편이 하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남편은 최선을 다해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낼 것을.

나는 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소중한 직장인 것을.



하지만 우리는 이 순간만큼은 소리 없는 최고의 복수를 상상하며 깔깔 대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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