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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우주 Aug 22. 2022

죽음이란 : 전문가들의 설명

20 Ⅱ. 죽음에 대하여 ⑤ -1

“죽음은 꽉 막힌 벽이 아니라 열린 문이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뜻하는 것이다”


죽음학의 불모지와 다름없는 우리나라에서 끈질기게 죽음을 탐구해온 정현채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는 죽음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라고 설명한다. 벽, 문, 차원, 이동. 죽음에 자주 따라붙는 단어들이다. 이는 은유로 동원된 표현이 아니다. 정현채 교수만의 독창적인 주장도 아니다. 죽음학 대가들이 죽음을 설명하는 일관된 표어들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며 육신의 몸을 벗은 영혼, 즉 생전의 몸과 분리되는 의식(Non-local consciousness)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죽음에 대한 짧은 지식은 정현채 교수의 책(주*)을 큰 줄기로 해서, 다른 책들로 가지치기를 하며 얻게 된 것이다. 나의 주관적 느낌이나 해석은 가급적 배제하고, 출처를 표기해 원문을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란 인간이 신에게 받은 최고의 선물’ 같은 관용구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죽음 그 자체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죽음이 혐오나 공포를 느낄 대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피하거나 미뤄야 할 삶의 파국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삶의 과정, 몸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한 생을 잘 살았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해낼 수 있는 삶의 과업 정도로 생각한다. 언젠가 맞이할 나의 죽음은 물론, 소중한 존재의 죽음 역시 그럴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 죽음을 맞이 한대도 슬프지 않을 도리야 없지만 세상이 끝난 듯 괴로워하거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할 만큼 심각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앞서 죽음 수용의 5단계에서 언급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우리나라에서 <인생수업>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인생수업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는데, 저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음학(thanatology)의 대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학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1960년대 임종이 가까운 환자 500여 명을 인터뷰해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펴낸다. 죽어가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정립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죽음 수용 5단계’ 모델이다.


엘리자베스는 1926년 스위스에서 세 쌍둥이의 첫째로 태어났다. 900g에 불과한 미숙아이자 자신과 생김새가 닮은 쌍둥이 동기들과 함께 세상에 나온 것은 생의 초기부터 존재의 근원을 고민하는 배경이 됐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첫인상은 어릴 적 아버지의 친구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집에서 죽음을 맞는 게 자연스러웠고, 임종을 앞둔 이는 죽기 전 이웃들을 불러 남은 가족들을 위한 당부를 했는데 어린 엘리자베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죽음을 앞둔 어른이 어린 자신에게 소중한 가족을 부탁하는 것에 엘리자베스는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열아홉 살 때 폴란드의 강제수용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수용소 벽에 그려진 나비에 마음을 빼앗긴다. 죽음을 앞둔 유대인들이 환생을 상징하며 그려둔 나비였다. 수용소라는 죽음의 공간에서 보낸 시간은 그가 평생에 걸쳐 삶과 죽음을 탐구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Photo by Dewang Gupta on Unsplash.com

엘리자베스는 이후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한 뒤 미국인 의사와 결혼해 뉴욕, 시카고 등에서 활동하게 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현대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죽음은 ‘의료의 실패’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때다. 그전까지 죽음이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맞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삶의 의례였다면, 이때를 기점으로 죽음은 일상에서 단절된 사건이 된다. 죽음이 중환자실이나 응급실 같은 병실에서 격리된 채 이루어지면 서다. 의학이 발전하면서 예전 같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병이나 심각한 외상에서 회복하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래서 더 죽음은 패배로 인식되고, 뒷전으로 밀려나게 됐다.


엘리자베스는 당시 누구도 관심 두지 않았던 시한부 환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방식으로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일에 주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학이 발전하면서 죽어가는 환자는 의술이 정복해야 하는 병을 가진 객체로 다뤄졌다. 엘리자베스는 말기 환자를 온전한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하며 그의 심리와 욕구를 연구하고, 주변인들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 결과물은 ‘죽음과 임종에 대한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발표했다.


엘리자베스의 이런 접근은 당대 의료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생생한 사례를 통해 현대 의학이 죽어가는 환자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함을 알렸기 때문이다. 이후 말기 환자를 위한 새로운 돌봄의 방식, 즉 환자의 욕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pallative care)가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다.


죽음학 대가의 일생을 이렇게 늘어놓은 것은 그가 죽음을 탐구한 여정 자체가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려동물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인간 환자의 죽음을 대하는 의료시스템, 사회 분위기에 문제의식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던 시기와 별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난 일이십 년 사이 반려동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수의학이 발전하고, 의료 접근성이 개선됐다. 그 결과로 동물의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사랑하는 동물의 죽음은 의사 혹은 반려인의 실패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동물의 죽음은 우리의 패배가 아니며, 생의 말기 동물 자신이나 보호자 모두에게 짐이 되는 연명치료에 의존하다 일상과 분리된 죽음을 맞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최선을 다 하는 것을 미덕으로 칭송하는 분위기 속에 생의 말기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평온한 죽음을 방해하는 과도한 의료적 개입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 시기엔 회복되기 어려운 병을 앓는 개별 동물의 심리와 욕구를 최우선으로 한 돌봄이 이뤄져야 한다. 보호자는 각별한 사랑을 나눠온 반려동물이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충분한 애도 속에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주: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정현채, 2018. p.104 정현채 교수의  책은 죽음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독서, 입문서로 권할 만한 책이다. 죽음을 둘러싼 각종 궁금증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다양한 참고 서적과 사례를 소개해   풍부한 탐구가 가능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30 넘게 임상에서 환자를 만나온 의사로, 또한 10 넘게 대중들 앞에 ‘죽음학 알려  강의자로 직접 수집한 사례도 곳곳에 제시하고 있다. 정현채 교수는  출간을 앞두고 2018  진단을 받았는데 죽음에 대한 단순한 지식을 넘어, 죽을병을 선고받은 당사자로서의 깊이 있는 사색도 담겨 있다. 특히 저자가 종교인이나 철학자가 아니라 과학과 물질을 신봉하는 과학자(의사)라는 점도 죽음 관련 담론에 의구심을 품는 독자들의 편견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있을 것이다. 정현채 교수가 책에서 소개하는 죽음에 대한 저작의 저자 대부분이 의사라는 점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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