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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불어YIU Oct 12. 2021

2불짜리 수프에 행복을 담는 방법

관계에 대하여.

여행 시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하기 전 아침식사는 가능한 한국에서 가져온 한식으로 가볍게 먹는다. 따라서 햇반과 진공포장된 국, 3분 요리 카레, 짜장밥 등은 내 여행 필수 템이다. 처음에 여행 동지들은 내 최애 템들을 보고 ‘이런 걸 이렇게 많이 챙겨왔느냐’고 웃지만 며칠만 지나보면 거의 100%의 확률로 내가 자신들의 몫까지 챙겨온 걸 고마워한다. 아무리 아메리칸 뉴욕 감성을 좋아하는 여행러들도, 토종 한국인이라면 온전히 한식을 떠날 수는 없으리라. 다행히 여행에서 한인 게스트 하우스를 활용하다 보면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한국 음식을 먹는데 아무런 제한이 없다.


그리고 점심과 저녁은 원하는 곳에서 식사를 한다. 그런데 만약 여행지가 뉴욕이라면, 피로감을 느끼고 입맛이 없을 때 반드시 내가 들르는 곳이 있다. 그곳은 맨해튼 미드타운 웨스트 지역에 있는 Sunac이라는 마켓이다. 꽤 규모 있는 슈퍼마켓인데 단연코 압권은 이곳에서 운영하는 샐러드 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방식으로, 접시에 담은 음식의 무게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방식이다. 이곳의 샐러드바는 가격 대비 음식의 품질이 상당하다. 고기, 야채, 과일 등 모든 것들이 싱싱하고 질이 좋은, 그야말로 물가가 비싼 뉴욕에서 1만 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그중 아내와 내 기억 속에 가장 인상 깊은 음식은 ‘치킨 누들 수프’이다. 매콤한 맛에 닭고기 살과 야채가 적절히 들어가 있는 다소 평범한 수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왜 우리는 많은 음식 중 그것이 기억에 남을까?


생각을 해보니 아내와 뉴욕을 여행했던 당시는 1월의 추운 겨울이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다닌 후에 간단한 점심을 먹으며 오후 일정을 짜보곤 했는데 그때 자주 애용했던 곳이 Sunac 마켓이었고, 추위를 녹이기에 그곳의 치킨 누들 수프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우리는 그 시간이 참 행복했다. 여행비가 충분치 않아 샐러드바의 많은 음식을 담아낼 수는 없었지만 소소한 양의 음식, 그리고 따뜻한 수프를 나누어 먹으며 나누는 시간들이 참 행복했다. 꽤 괜찮았던 맛도 그렇지만, 치킨 누들 수프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도구와도 같은 음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뉴욕의 수많은 맛집들의 메뉴보다 ‘치킨 누들 수프’를 그리워한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함께했던 기억만 남는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서 다 같이 끓여먹었던 라면이 유달리 맛있었던 이유는 특별한 레시피로 만들어진 요리여서가 아니라 왁자지껄 떠들며 나와 함께 있어준 친구들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서 많은 경우 행복은 ‘함께함’에 의해 좌우된다. 최고의 셰프가 해주는 수십만 원짜리 음식이라도 테이블에 혼자 앉아 먹는다면, 경험으로써의 만족은 있을지라도 행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도시에서 함께 나누어 먹는 2불짜리 수프는 잊을 수 없는 행복의 경험을 선물해 준다. 기독교 작가 유진 피터슨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관계’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이는 정확하다.


시대는 점점 ‘홀로’가 대세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 솔직히 귀찮다. 혼자가 편안하다. 유튜브와 넷플릭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편안함은 있을지언정 ‘의미’는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삶에서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우리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이 공간에 의미가 생겨나고, 그녀와 함께 할 때 2불짜리 수프가 행복이 된다.


시대에 속아 사람을 잃고, 의미를 잃고, 내 이야기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내 주변의 ‘그들’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초청한다면, 2불짜리 수프도 내 삶의 빛나는 이야기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행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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