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속도로 걸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계절
가을은 참 이상합니다. 천천히 오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면 이미 제 어깨에 손을 얹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던 날도 그랬습니다. 성곽길을 걷고 있었죠. 바람이 조금씩 색을 데리고 와 숲을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멈춰 서서 바라보다가 그제야 알았어요. “아, 가을이 이미 여기 있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조금 느려졌습니다.
멀리 성곽 위를 걷는 사람 하나가 보였습니다. 정말 작았습니다. 이 광활한 풍경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였죠. 그런데 묘하게도, 그 작은 사람 때문에 풍경이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있으니까 길이 의미를 얻고, 걸음이 있으니까 계절도 함께 움직이는 듯 느껴졌어요.
카메라를 들고 이 장면을 담으면서 마음 한쪽이 묵직해졌습니다. 가을빛이 성곽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보내야 할 때구나’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성곽은 참 오래됐습니다. 얼마나 많은 계절을 견뎌왔을까요. 비도 맞고, 눈도 뒤집어쓰고, 강한 햇빛에 색이 바랬을 시간들. 그런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굽은 길을 따라 이어지며 누군가의 발걸음을 말없이 받아내고 있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게 이런 걸까?’ 견디는 시간을 지나 결국 자기만의 길을 남기는 일 말이에요. 숲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나무들은 각자 다른 속도로 물들고 있었어요. 아직 초록을 품은 나무도 있었고, 이미 황금빛으로 깊어진 나무도 있었습니다. 누가 더 옳다거나, 더 빠르다고 말할 수 없었죠. 그저 각자의 속도로 가을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요.
저도 요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느릴까?” “다른 사람들은 벌써 저만큼 갔는데…” 그런 생각에 마음이 자주 초조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숲을 보고 나니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멀리 보이는 작은 누각도 인상적이었어요. 숲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연과 싸우지 않고, 자기 자리를 찾아 조용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람도 이렇게 자기 자리를 찾으면 조금은 평온해질 수 있을까?’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습니다.
그 느린 걸음이 이상하게 저를 위로했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그 뒷모습이 대신 전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빨리 가는 것보다 계절이 제 등을 밀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고 한참 후에 다시 바라보니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습니다. 조금 외로운 길이지만 따뜻한 빛이 감싸고 있었어요. 깊어가는 가을의 색,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 속도로 걷는 한 사람. 그 모습이 어쩐지 지금의 저를 닮아 보였습니다. 우리는 가끔 계절보다 너무 앞서 나가려 하고, 또 가끔은 너무 뒤에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연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때가 되면 내가 네 등을 살짝 밀어줄게. 그러니 너는 네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면 돼.”
그래서인지 이 사진 속 가을은 아련하지만 슬프지 않았습니다. 지나가지만 사라지지 않는 느낌, 마치 삶이 건네는 조용한 인사처럼요. 바라보면 알게 되고, 천천히 걸으면 들리게 되는 그런 인사. 오늘도 계절은 제 등을 살짝 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손길을 따라 제 속도대로 한 걸음 더 내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