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표지 사진: 발산역 @ 위키백과, <발산역>
아침 6시, 오늘도 어김없이 자명종이 요란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태경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머리맡을 더듬어 탁상시계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더듬어도 탁상시계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젯밤 오늘 아침을 대비해 스스로 취한 예방조치 때문이었다. 제때에 일어나지 못할까 봐 미리 침대 머리맡에 탁상시계를 손이 닿지 않는 침실 바닥에 내려놓고 잠이 들었던 것이다. 태경은 이불을 머리 위로 푹 눌러쓰고 저항을 시도했지만 자명종은 포기할 줄 몰랐다.
‘망할 놈의 자명종!’
태경은 탁상시계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버리고 억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발을 뻗어 방바닥에 놓인 탁상시계의 알람 버튼을 눌러 껐다. 태경은 늘 잠이 부족했기에 매일 아침 늦잠의 유혹은 마약과도 같았다. 더구나 오늘 아침은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피로감은 그만큼 더 심했다. 그러나 휴식과 여유는 그에겐 사치였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가까스로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욕실로 향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면대에 찬 물을 가득 받고 물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찌릿한 한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태경은 한동안 숨을 참고 물속에 머리를 담근 채 버텼다. 지긋지긋한 현실로 복귀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참고 견디려 해도 숨을 멈추고 버티는 것은 오륙십 초가 고작이었다.
‘더……, 조금만 더……’
그러나 곧 한계가 찾아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면대에서 머리를 드니 욕실 거울에 비친 초췌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물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칼, 축 처진 어깨에 피곤에 절어 퀭한 눈을 한 30대 후반의 사내, 매일 아침 욕실 거울을 통해 마주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따금 헛된 망상이려니 하면서도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다음날 아침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 현실은 매번 변함이 없었다. 오늘도 환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또다시 힘겨운 일상을 시작해야만 했다. 어젯밤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한 탓에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었다. 그는 환상을 털어버리려는 듯 샤워기를 틀어 쏟아지는 뜨거운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서둘러 출근준비를 마친 태경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아파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가 기거하는 25평짜리 작은 아파트는 세상과 격리된 그만의 안식처였다. 상자 같이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그는 남몰래 인생의 상처를 달래 가며 숨어 지냈다. 이곳에서만큼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한없이 약해질 수도 마음껏 아파할 수도 있었다.
바깥세상은 그에게 살벌한 정글이나 다름없었다. 강자의 먹잇감이 되어야만 하는 약자에게뿐만 아니라 강자인 포식자에게도 정글은 비정한 공간이긴 마찬가지였다. 사냥에 실패하면 포식자라 할지라도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죽음을 맞아야 한다. 그것이 잔인한 정글의 법칙이었다. 그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정글과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살벌한 공간이었다.
아파트 밖으로 나서는 순간 태경은 집안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했다. 말쑥한 슈트 차림에 결의에 찬 눈매, 힘찬 발걸음, 그는 생존투쟁에 나설 준비를 마친 전사 같았다. 일순간에 기운을 회복하는 마법의 영약이라고 마신 듯 불과 한 시간 전에 초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도 그는 악착같이 싸워 이겨야 했다. 아니면 잡아먹혀야 하니까.
늦지 않게 출근하기 위해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가 사는 곳에서 직장까지는 지하철로 꼬박 1시간 반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나마 집 가까이에 지하철역이 있어서 그럭저럭 출퇴근이 가능했다. 일단 5호선 발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영등포구청역까지 가서 다시 그곳에서 2호선으로 환승해 시내 중심가를 거쳐 건대입구역까지 가야 했다.
아침마다 지하철은 출근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특히 환승역인 영등포구청역은 지하철을 갈아타려는 거대한 쌍방향 인파가 한데 뒤엉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지옥철’, ‘출근전쟁’ 등 출근시간 지하철 안의 대혼란을 묘사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전혀 과장됨이 없이 꼭 표현 그대로였다.
5호선 플랫폼에서 2호선 플랫폼으로 이동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 끼여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 있던 태경은 앞선 사람들과 에스컬레이터 옆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문득 TV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을 통해 본 아프리카 사바나의 누 떼가 떠올랐다. 줄지어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도강 중에 급류에 휩쓸리거나 악어의 습격을 받아가면서도 기를 쓰고 헤엄을 쳐 건너편 가파른 강기슭을 오르는 누 떼와 어찌나 똑같은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누 무리는 신선한 목초지를 찾아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넌다. 저들도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저리도 분주히 움직이는구나 싶으니까 문득 서글퍼졌다.
‘산다는 게 도대체 뭔지……’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객차 안에서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한참을 부대끼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건대입구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플랫폼에 멈춰 서고 자동문이 열리자 태경은 인파에 휩쓸려 객차 밖으로 쏟아지듯 밀려 나왔다. 인파를 헤치고 지하철 출구를 거쳐 지상으로 빠져나오자 해방감에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굴을 때리는 초겨울 찬바람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해방감도 잠시, 저 멀리 높은 직장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온몸에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그곳이 바로 그가 오늘 하루 또다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Bravo, 청룡! 0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