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청룡! 02

단편 소설

by 금사대제

표지 사진: 신선 식품 매장 @ 이마트





남들이 보기에 그는 그런대로 성공한 인생이었다. 대학 졸업 후 바늘구멍이라는 취업문을 뚫고 당당히 국내 유명 대기업 계열의 유통회사에 입사해 지금은 차장 직급을 달고 구매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입사동기들에 비하면 승진도 빠른 편이었다.


게다가 4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장만해 대부분의 직장 동료들은 꿈도 못 꿀 어엿한 서울 시내 주택보유자였다. 입사한 이래 허리띠를 졸라매고 알뜰살뜰 모아 온 저금을 모조리 쏟아붓고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만큼 막대한 은행 빚까지 끌어 써야 했지만 그래도 강서구 등촌동에 그럴싸한 아파트를 한 채 장만할 수 있었다. 비록 지은 지 2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였지만 최근 몇 년간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바람에 집값이 많이 올라 성공한 투자였노라고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형편이었다.


삼십 대 끝자락인데도 아직 독신이라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만혼(晩婚), 비혼(非婚)이 만연한 요즘 세태에 비춰볼 때 그다지 큰 흠도 아니었다. 요즘같이 살기 어려운 시절에 그가 이 정도 삶을 유지하는 비결은 오직 하나, 군에서 제대한 이후 십수 년 간 이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온 결과였다.


태경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책상 위 컴퓨터를 켜 입고현황을 체크하고는 자료를 출력해 아래층 매장으로 향했다. 대형 마트 구매 담당자의 일과는 매장을 돌며 거래처에서 납품된 품목을 검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계약된 품목이 수량만큼 제대로 납품이 되었는지, 품질은 만족할 만한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태경은 곧장 그가 담당하는 지하 1층 식품 매장으로 내려갔다. 아직 개점시간 이전이라 매장은 손님 맞을 준비로 부산했다. 지하 하차장에서 쉴 새 없이 물건을 실어 나르는 지게차들이 매대 사이를 오가며 울려대는 경고음, 청과물, 농축산물, 수산물 등 당일 판매할 신선식품류를 매대 위에 배치하느라 바쁜 담당 직원들, 매일 아침 식품 매장에서 벌어지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태경은 하루 일과 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매장 안의 시끌벅적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삶의 활기가 느껴져 절로 기운이 나고 기분마저 상쾌해지곤 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이 활기찬 모습도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매장에 손님을 끌어들이려면 질 좋은 물건을 남보다 싸게 팔아야 한다. 싸게 팔아도 이윤을 남기려면 방법은 한 가지, 납품업자를 쥐어짜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가 입사 직후 처음 구매 업무를 맡았을 때 상사로부터 들은 첫마디가 납품업자의 목에 빨대를 꽂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쪽쪽 빨아 마시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갑이고 그들은 을이니 응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잘라버려라, 잔인하고 더럽지만 그것이 사업이고 우리는 그 일을 하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거라고…… 이 세상이 정글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말단직원인 그는 직장 내에서 을이었고 싫든 좋든 갑의 뜻에 따라야 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 역시 직장에서 잘리기는 매일반이었다. 납품업자를 후려치는 것이 결코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지만 태경은 최대한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때론 납품 조건을 두고 다투다 납품업자에게 멱살잡이를 당하는 험한 꼴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물러서거나 움츠려들지 않았다. 어차피 먹고 먹히는 것이 사회생활의 실상이다 보니 견뎌내지 못하는 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 세상을 살아 내야 했고 가능하면 승리자가 되고 싶었다. 납품업자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면모를 보이는 것 외에 직장 내에서 성공의 사다리를 기어오르기 위해 태경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입사하기 전까지 그는 식품의 ‘ㅅ’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판매 실적을 올리려면 싼 가격 이외에도 상품의 질이 좋아야 했다. 상사로부터 납품업자를 다루는 법은 배울 수 있었지만 질 좋은 상품을 골라내는 안목을 갖추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태경은 신입사원 시절 식품의 상품가치에 관한 안목을 기르기 위해 없는 시간을 쥐어짜 각종 시장과 그곳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을 탐방하고 다녔다. 출근 전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가락동 청과물 시장에 들러 경매과정을 지켜보고 청과물 가게들을 둘러보며 과일과 야채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수산물을 잔뜩 사고 상인들을 상대로 싱싱한 수산물을 고르는 방법을 묻곤 했다. 쉬는 날에는 경쟁사의 식품 매장을 찾아가 상품의 종류와 질, 진열 상태 등을 점검하기도 했다.


각종 시장을 둘러보면서 태경은 물건을 파는 상인들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의 구매형태 또한 주도면밀하게 관찰했다. 넉살 좋게도 자취생을 자처하며 장을 보는 아주머니들에게 접근해 좋은 물건을 고르는 요령을 묻기도 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입사 한 지 3년이 지날 무렵 태경은 평생 장사로 잔뼈가 굵은 상인들 못지않게 신선식품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돈과 시간 그리고 정성을 들인 대가였다.


그 덕분에 회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남보다 빠른 승진을 거듭한 끝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매장을 한 바퀴 둘러보니 신선식품 코너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와 연말 특선상품 코너가 문제였다. 와인 숍에 크리스마스 선물용 고급 와인 컬렉션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Bravo, 청룡! 0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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