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청룡! 05

단편 소설

by 금사대제

표지 사진: 당산역 @ 위키백과, <당산역>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갔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이벤트를 치르고 나니 어느새 12월 29일 올해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유통업계에서 일하느라 1년 365일 사실상 쉬는 날이라고는 없는 태경에게도 오늘만은 여유가 있었다. 오래간만에 연말연시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주말을 끼고 내년 1월 1일까지 3일 연차를 냈기 때문이었다. 이번 휴가에는 어디 가까운 교외에 나가 바람이라도 한 번 쐬고 올 작정이었다.


연말 이벤트까지 무사히 마쳤겠다, 퇴근 시간까지 별다른 할 일도 없었던 터라 거래처를 돌아보며 연말 인사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오후 3시쯤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을 나섰다. 회사를 빠져나와 곧장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그에겐 집 외엔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퇴근길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열차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늘 술에 취해 퇴근 인파로 가득 찬 열차에 끼여 파김치가 된 채 귀가하곤 했다. 오늘은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아 정신도 말짱했다.


열차가 당산역에 멈추자, 문이 닫히기 직전 태경은 충동적으로 플랫폼으로 뛰어내렸다. 당산역에서 내리면 9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다. 집과는 반대 방향이지만 9호선을 타면 학교 앞까지 갈 수 있었다. 일찍 회사를 벗어나기 위해 거래처 직원과 선약이 있노라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실 오늘 태경에게는 선약이 있긴 있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당산역에서 지하철이 멈춰 서고 ‘9호선을 이용할 승객께서는 이번 역에서 하차하시어 열차를 갈아타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문득 오늘 Blue Dragons 모임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열차에서 내려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총무 인철이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날짜는 오늘이 맞고 약속시간까지는 아직도 세 시간가량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태경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플랫폼 벤치에 앉아 한동안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수차례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다가 떠나갔다. 30분 넘게 텅 빈 플랫폼에 혼자 앉아있던 태경은 마침내 몸을 일으켜 9호선 플랫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차피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 할 일은 없었다. 멍하니 TV나 보다가 일찍 잠들 뿐이었다. 그러느니 학교 구경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다. 졸업 후 단 한 차례도 모교를 찾아간 적은 없었다. 문득 모교 캠퍼스가 그리워졌다. 따지고 보면 그곳은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중에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추억의 장소였다.


열차를 갈아타고 9호선 흑석역에서 내렸다. 지하철 출구를 나서니 맞은편 산기슭에 모교 캠퍼스가 바라 보였다. 경사로를 천천히 걸어 내려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모교 인근 대학가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캠퍼스 정문으로 향하는 길목에 사대부고가 있던 자리엔 높다란 대학병원이 들어서 있었다.


대학병원 앞을 지나쳐 안동장으로 향하다가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까지는 아직도 꽤 여유가 있었다. 태경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 학교 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교 캠퍼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학가뿐만 아니라 학교 역시 낯설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였다.


학교 앞 정문으로 쓰이던 육중한 철대문은 사라지고 대신 학교 로고를 형상화한 거대한 아치형 조형물이 서 있었다. 캠퍼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담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캠퍼스 안에도 못 보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다른 학교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낯설어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긴 분명 그가 청춘을 보낸 모교였다. 그는 이곳에서 강의를 듣고, 시험을 보고, 학우들과 어울러 놀았다. 캠퍼스를 둘러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미 방학을 한 데다 세밑이어서 캠퍼스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 텅 비어 있었다. 차라리 그 편이 좋았다. 태경은 이미 캠퍼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다. 주변에 젊은 후배들이 많았다면 오히려 어색했을 것이다.




<Bravo, 청룡! 06에서 계속>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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