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표지 사진: 중앙대학교 흑석 캠퍼스 겨울 전경 / 이정환, '중앙대, 정시 경쟁률 8.37대 1… 1만 8445명, 최다 지원’, UNN, 2023-01-02
내친김에 가파른 계단을 따라 후문까지 올라가 보았다. 산비탈에 지어진 캠퍼스 정상, 학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대학 설립자의 묘소가 조성돼 있다. 일명 ‘할머니 무덤’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그곳까지 올라가 할머니께 넙죽 큰절까지 올리고는 태경은 무덤 앞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느라 숨이 차고 다리도 아팠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한창 해가 짧을 시기여서 어느덧 저 멀리 바라보이는 한강 너머로 붉은 태양이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해가 지고 주위에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한동안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숨을 고르던 태경은 한기에 몸을 떨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래 만나자, 내가 역적질을 한 것도 아닌데 그들 앞에 당당히 서지 못 할 이유라도 있나? 난 그저, 내 인생을 살아 내고 있을 뿐이다.’
오랜 망설임을 접고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로 마음을 굳힌 태경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썰렁한 학교 캠퍼스를 벗어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왔던 길을 되짚어 안동장을 찾아갔다. 안동장, 역시 위치는 그 자리 그대로였으나 리모델링을 해 겉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프런트에 Blue Dragons의 이름을 대니 종업원이 예약된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태경은 방문을 열기 전 다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방안에선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약속시간이 조금 남았는데도 일찍 온 회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의 앉아있던 네댓 명의 시선이 일제히 태경에게로 쏠렸다.
“어이, 이게 누구야. 강태경, 진짜 오래간만이다!”
“야, 이게 얼마만이냐? 하도 소식이 없어 너 어디 외국에 이민이라도 간 줄 알았다.”
동아리 회원들의 인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총무 인철이가 자리에서 일어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아무 연락이 없어 넌 오늘 못 오는 줄 알았다. 아무튼 반갑다.”
태경은 회원들이 자신을 서먹하게 대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회원들의 환대에 어색한 쪽은 오히려 태경 자신이었다. 회원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태경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 오자 하나둘 반가운 얼굴들이 모여들었다. 선배들도 몇 명 있었고 다른 몇몇은 후배들이었다. 개중에는 낯을 모르는 후배도 한두 명 끼여 있었다.
그러나 오늘 모인 이들은 대부분 05학번 동기들이었다. 오늘 모임의 목적이 망년회를 겸한 동기생 형준의 앨범 출시를 축하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임형준, 학창 시절 태경만큼이나 로큰롤에 대한 열정이 남 달랐던 친구였다. 05학번 입학 동기이자 Blue Dragons 입회 동기이기도 했다.
그는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담당했고 태경처럼 작곡에 대단한 열정을 보였었다. 음악이라는 공통 관심사 덕분에 총무 인철과 더불어 동기들 중에서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다. 도중에 음악을 포기해 버린 태경과는 달리 형준은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음악계에서 일하며 곡을 썼다. 무명의 서러움을 견뎌가며 꾸준히 작곡 활동을 계속했고 마침내 작곡한 몇 곡이 꽤 인기 있는 신인 록 밴드의 앨범에 수록되기에 이른 것이다. 주인공은 맨 나중에 등장한다더니 형준은 약속시간을 30분가량 넘겨 가장 늦게 안동장에 나타났다.
“야 임형준, 앨범 내더니 귀하신 몸 됐다고 느지막이 행차하신 거냐?”
“아니야, 귀하신 몸은 무슨…… 하 하 하, 연말이라고 길이 어찌나 막히던지……”
올 사람이 다 오자 드디어 망년회가 시작되었다. 술과 음식이 나오고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회원들이 잔을 채우자 총무 인철이가 자리에서 일어서 건배를 제안했다.
“자 여러분 모두 잔을 들어주어 주십시오. 모두 함께 우리의 추억 어린 건배사를 외치며 오늘의 모임을 시작할까 합니다. Bravo, 청룡!”
“Bravo, 청룡!”
방안에 모인 회원 모두가 힘차게 따라 외쳤다. ‘Bravo, 청룡!’, Blue Dragons 회원들이 학교의 상징이자 록 밴드의 명칭이기도 한 Blue Dragons를 기리기 위해 외치는 그들만의 건배사였다. 대학시절 태경 역시 선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수없이 외쳤던 건배사였다. 이 건배사를 외칠 때마다 자신도 누구보다 뛰어난 로커가 되겠노라 다짐하곤 했었다.
순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면서 깊은 좌절감과 비애가 가슴속에 차올랐다. 모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단연 앨범을 낸 형준이었다. 주위에서 축하와 격려의 인사가 쏟아지자 형준은 감사를 표하며 준비해 온 악보에 일일이 사인을 해 회원들에게 나눠주었다.
<Bravo, 청룡 07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