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표지 사진: 청룡상 @ 중앙대학교
‘Blue Dragons’,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이었다. 18년 전 갓 스무 살의 대학 새내기였던 태경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꿈꾸던 풋풋한 젊은이였다. 중고교 시절부터 비틀즈(The Beatles),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퀸(Queen) 등 브리티쉬 록(British Rock)에 심취해 있던 태경은 대학 1학년 때 맞이한 첫 대동제에서 교내 록 밴드 동아리 ‘Blue Dragons’의 공연을 지켜본 후 로큰롤(rock'n'roll)에 푹 빠져버렸다.
스무 살, 뭐든지 새롭고 자극적인 것에 끌리는 나이였다. 2005년 대학생이 된 태경의 인생은 충만하기 그지없었다. 답답한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뭐든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해볼 수는 자유와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시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들떠 놀기 바쁜 대학 신입생 시절, 학과 공부는 안중에도 없고 무언가 흥미로운 재미거리를 찾고 있던 태경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로큰롤이었다.
가슴을 울리는 강렬한 사운드, 현란한 조명 아래서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악기 퍼포먼스는 젊은 열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록 밴드 중에 특히 태경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드럼 연주였다. 사자의 갈기 같은 장발을 휘날리며 헤드뱅잉을 하고, 빠른 템포에 맞춰 북을 두드리는 드러머의 퍼포먼스에 그만 넋을 잃고 매료돼 버렸다.
태경은 그 다음날 곧바로 Blue Dragons에 입회했고 드러머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동아리 방에서 스틱으로 폐타이어를 두드리며 연주 연습에 매진했다. 그 무렵 그의 인생의 목표는 비틀즈의 링고 스타(Ringo Starr)나 더 후(The Who)의 키쓰 문(Keith Moon)과 같은 뛰어난 드러머가 되는 것이었다.
태경에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했다. 그는 학교생활은 전공 공부는 뒷전이었고 동아리 활동이 주였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동아리 방에서 살다시피 했고 같은 과 학우들보다 동아리 선후배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훨씬 잦았다.
음악에 심취한 태경은 전공과목을 제쳐두고 음대에 가서 실용음악 작곡이나 화성학 같은 과목들을 신청해 수강하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태경은 자신이 특출한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작곡 재능은 음대생들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뒤늦게 품은 열정에다 주변의 인정과 격려까지 얹어지자 태경의 음악에 대한 집착은 무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그에겐 로큰롤 뮤직 이외에 다른 것은 모두 무가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군대에 가기 전 두 해 동안 태경은 Blue Dragons 회원들과 어울려 록 스피릿을 논하고 낭만에 취해 꽃다운 청춘을 만끽했다. 태경은 늘 책 대신 드럼 스틱을 끼고 학교를 다녔고 언젠가 세상을 놀라게 할 위대한 로커가 되겠노라 호언장담하곤 했다.
군에 입대한 후에도 틈틈이 작곡을 했다. 군 복무를 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제대를 손꼽아 기다리며 사회 복귀 이후엔 본격적으로 연주와 작곡 생활을 시작하겠노라 포부를 품었으나 인생은 뜻대로 풀려주지 않았다.
2009년 2년여의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당시 세상은 뒤숭숭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로 세계는 극도의 경기침체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여파는 태경에게도 미쳤다. 평생 자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시던 그의 부친이 갑자기 찾아온 경제 불황 때문에 그만 부도를 내고 파산하셨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태경은 복학 후 학비를 걱정해야 할 만큼 형편이 어려워졌다.
군복무 중에는 제대만 하면 아무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인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부친이 파산하신 이후엔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부모의 보조가 사라져 버렸고, 군대생활을 통해 철이 들어 이제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성숙한 각성이 무겁게 양쪽 어깨를 내리눌렀다.
위안을 얻을까 싶어 믿고 따르던 동아리 선배들을 찾아갔으나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오히려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그렇게도 이상이 높아 보이던 선배들은 대부분 졸업 후 꿈을 접고 음악과는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서 살길을 찾아 골몰하고 있었다.
태경은 냉혹한 현실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좌절해야만 했다. 그 역시 음악으로 성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제대 후 복학하기 전까지 몇 달을 번민하던 태경은 결국 갑자기 몰아닥친 생활고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위대한 로커의 꿈은 고사하고 그가 당면한 현실은 남은 학업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지 조차 미지수일 만큼 암담했다. 복학을 며칠 앞둔 2월의 어느 날 저녁 태경은 그동안 써 놓은 작곡 악보들을 들고나가 마당에서 불태워버리고는 로커의 꿈을 접었다.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악보 뭉치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서글픈 눈물이 흘러내렸다.
복학 후 태경은 음악에 대한 미련을 끊어버리기 위해 Blue Dragons 활동도 접었다. 강의실보다도 더 자주 가던 동아리 방에도 발길을 끊었고 록 밴드 멤버들과의 교류도 중단했다. 로큰롤은 이미 그에겐 지나간 옛 추억일 뿐이었다.
이후 태경은 과거와 단절하고 학업에만 열중했다. 그에게 집안의 보조 없이 학업을 이어갈 가장 유망한 방법은 열심히 공부해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는 것이었다. 입대 전 전공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태경에게 새롭게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1, 2학년 때 공부를 도외시한 탓에 학점까지 엉망이어서 낙제한 과목들을 재수강하느라 학교를 1년이나 더 다녀야 했지만 태경은 이 악물고 공부에 매진했고 어렵게 남은 학기들을 장학생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그나마 전공이 경제학이어서 졸업 후 바늘구멍이라는 취업문을 뚫고 어렵사리 지금의 직장에 입사할 수 있었다. 졸업 후 태경은 의도적으로 동아리 회원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학창 시절 친 형제들 보다도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었으나 그들은 그에게 잊고 싶은 과거의 꿈을 상기시켜 주는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전화 한 통 주고받지 않은지 벌써 10년도 더 되었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엔 문자 메시지를 지워버릴까 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스마트 폰을 주머니에 넣고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에겐 오늘 할 일이 태산이었다. 과거의 추억 되새김질은 여유 있을 때 챙겨도 될 일이었다.
<Bravo, 청룡! 0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