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Aug 24. 2022

루시

은석은 오늘도 늦는 모양이었다. 시간은 벌써 밤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니는 소파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유령여행사에 다녀온  계속 엄마 생각만 했다. 세상에 동명이인이 많다고는 하지만 국제결혼을 해서 한국으로 건너간 체코 여인 루드밀라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지니의 판단이었다.

지니는 하루 종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엄마에 대해서 이름 말고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심지어 성도 몰랐다. 고향이 어딘지는 물론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디 사는지도 몰랐다.

엄마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라고는 아빠가 한국에서 사고를 당하고 프라하로 이민을 온 뒤 가끔 해준 게 전부였다. 엄마는 아빠에게도 가족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부모는 누구인지도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자기 이야기를 남편에게도 해주지 않은 것일까?’

지니는 문득 아빠에게서 흐릿하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사고를 당할 때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다는 이야기였다.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체코의 부모에게 가보자고 해 선물을 사러 갔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왜 갑자기 한국에서 체코로 돌아오려고 했을까?’

지니는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밤을 꼬박 지새울 작정이었다. 한국 관광객을 안내하는 날이면 자정 무렵에 귀가하는 게 일상적이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빠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니는 안드레이가 말해준 이름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루드밀라 프르셰미슬!’

지니는 소파에 앉아 있는 게 갑갑하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 여권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버리지 않은 엄마의 여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맞아! 여권을 보면 엄마 이름과 성이 나올 거야. 그걸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지.’

지니는 엄마의 유품을 정리해둔 작은 방으로 달려갔다.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둔 가방을 모두 풀어 속에 든 것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여권은 맨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여권에는 이제 30대 초반인 여성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엄마!’

지니는 가슴이 저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사진을 뺨에 대고 비볐다. 아직도 엄마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가 생각났다.

‘잘 자라 야니첵 잘 자거라

사과 세 개를 선물로 줄 거야

첫 사과는 빨간색 두 번째는 초록색

잘 자라 야니첵 잘 자거라

작은 눈을 꼭 감고 잘 자거라

잘 자라 야니첵 잘 자거라

사과 세 개를 선물로 줄 거야

하나는 빨간색 둘째는 초록색

마지막 사과는 파란 하늘색

잘 자라 야니첵 사랑하는 내 아기.’

지니는 뺨에 가져다 댄 여권을 다시 펼쳤다. 엄마 사진 아래에 영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루드밀라 프르셰미슬.’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니는 휴대폰 시계를 봤다. 벌써 새벽 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은석이었다. 그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은 단체 관광객이 일정을 마치고 프라하를 떠나는 날이어서 평소보다 조금 늦은 모양이었다.

“왜 아직 안 잤어? 기다리지 말라고 했잖아.”

은석은 지니를 꼭 껴안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늘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엄마가 없으니 아빠가 더 많이 챙겨야 하는데 항상 밖에서 일하다 자정이나 돼야 돌아오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

“사람들은 잘 보냈어? 피곤하지 않아?”

“우리 딸 다 컸네. 아빠 걱정도 하고.”

은석은 가방을 소파 한쪽 구석에 던졌다. 점퍼는 거실 한쪽의 옷걸이에 걸었다. 그는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런데 왜 안 잤어? 평소와 달리.”

은석은 갑자기 지니가 깨어있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딸은 잠이 많아 평소라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아이였다. 이렇게 늦게까지 깨어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아빠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은석은 소파에 몸을 던지다시피 앉았다. 피로가 온 몸을 살살 갉아먹더니 머리끝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우리 딸이 뭘 물어보려고 그러시나?”

지니는 은석 옆에 조용히 앉았다.

“엄마 성이 뭐야?”

은석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눈을 지니에게 돌렸다.

“갑자기 엄마 성은 왜?”

“그냥 알고 싶어서 그래. 나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는 것 같아.”

은석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딸을 똑바로 쳐다봤다.

“무슨 일인데?”

지니는 아빠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성이 프르셰미슬 맞아? 루드밀라 프르셰미슬?”

은석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가 엄마 성을 어떻게 아는 거니?”

딸은 아빠에게 엄마의 여권을 슬며시 내밀었다.

“여기에 적혀 있잖아.”

은석은 여권을 받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내의 밝은 얼굴이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 이름이 야로미르야?‘

지니가 낯선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야로미르? 처음 듣는 이름인데. 할아버지 이름은 아빠도 몰라. 엄마가 이야기해주지 않았어. 엄마랑 함께 고향에 갔다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름도 알게 됐겠지.”

“엄마 고향은 어디야?”

“블라트체라고 했어.”

“블라트체? 거기가 어디지?”

은석이 블라트체라는 도시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아내 루드밀라의 입을 통해서였다. 아내는 붕괴사고가 나기 한 달 전에 부모가 블라트체에 산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부모에 대해 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루드밀라는 블라트체에서 유명한 집안의 외동딸이라고 했다. 도시가 제대로 생기기 전부터 1천 년 넘게 조상대대로 살아온 가문이라는 것이었다. 체코를 건국한 왕조의 후손이라고 아내는 강조했다.

은석은 딸이 난 데 없이 루드밀라의 과거를 묻는 것에 대해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엄마의 성과 고향을 묻는 거니?”

“블라트체에 가고 싶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고 싶어. 엄마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샤아아!

은석의 등 뒤에서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아무리 새벽이라도 7월 초에 이렇게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크아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끔찍한 괴성과 함께 그의 머리 위로 난데없이 눈이 쏟아졌다. 은석은 초여름에 어째서 눈이지, 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추위를 느끼면서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빠!”

지니는 쓰러진 은석에게 달려가 얼굴을 만졌다. 아빠의 얼굴 곳곳에는 하얀 서리가 두껍게 붙어 있었다. 얼굴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한겨울에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밖에 나서는 바람에 얼어 죽은 사람처럼 온 몸에도 서리 천지였다.

지니도 견디기 힘든 한기를 느꼈다. 그는 문 쪽을 쳐다봤다. 그곳에서 하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 사이로 혹한기에 블타바 강을 꽁꽁 얼리는 한파처럼 냉혹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꽉 닫힌 문에서 흐릿한 흔적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눈과 냉기는 그 흔적 주변에서 나오고 있었다.

“누…누구세요?”

지니는 팔짱을 낀 채 추운 몸을 바르르 떨며 흐릿한 흔적을 노려봤다.

흐릿한 흔적은 조금씩 분명한 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문 쪽에는 빛이 없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지니는 그것이 유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지니라는 아이니?”

유령은 아주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누구세요?”

지니는 다시 물었다.

유령은 문 쪽에서 거실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거실의 희미한 등 아래에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할머니는!”

지니의 집에 들어온 유령은 할머니였다. 며칠 전 지니와 리즈, 쿨이 유령 여행사를 찾아갈 때 틴 성모 교회 앞에서 길을 가르쳐준 그 할머니, 파블리나였다.

“우…우리 집은 어…어떻게?”

파블리나는 지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가 지니인 줄은 몰랐구나. 그날 낮에 볼 때는 호기심이 많고 용감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안타까워.”

파블리나의 손에서 흘러나온 서리는 지니의 얼굴과 몸을 서서히 덮었다. 지니는 기절하지는 않았지만 입이 얼어붙어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켈리 씨가 너를 붙잡아오라고 하셨어. 왜 그런지는 말씀해주시지 않더구나. 죽이지는 말고 산 채로 잡아오라고 지시하셨지.”

켈리가 그를 왜 잡으려고 하는지 지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는 냉기가 몸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걸 느끼며 조금씩 정신을 잃었다.

덜컥!

야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주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지니는 감기던 눈을 다시 떴다. 낯익은 고양이 세 마리가 파블리나 뒤에 서 있었다. 양쪽에 선 두 마리는 집에서 키우는 얀과 파벨이었다. 가운데 고양이는 안드레이가 운영하는 유령여행사에서 본 고양이였다.

‘루시!’

파블리나는 몸을 흠칫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은 독기를 품고 날카롭게 번득였다.

“루시! 왜 이러는 거니?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나는 이 아이만 데려가면 돼. 그러니 그냥 조용히 나가주면 안 되겠니?”

야옹!

루시는 더 크게 울음소리를 냈다.

야옹!

얀과 파벨도 루시를 따라 소리를 질렀다.

파블리나는 지니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몸을 뒤로 돌렸다. 지니에게로 쏟아지던 눈과 한기는 세 고양이 쪽으로 날아갔다.

크양!

루시가 화난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파블리나의 얼굴 쪽으로 뛰어올랐다. 파블리나는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화들짝 놀라며 창 쪽으로 몸을 피했다.

야옹! 야옹!

또 다른 고양이 울음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이번에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울어대는 소리였다.

아직도 한기에 시달리는 지니는 무릎을 꿇고 몸을 덜덜 떨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틀은 물론 정원과 담벼락에 고양이 수백 마리가 보였다. 열린 문으로 고양이 수십 마리가 들어왔다. 그들도 파블리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야옹!

파블리나의 낯빛이 급속하게 어두워졌다. 고양이들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손을 저으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루시는 파블리나를 따라 한걸음씩 앞으로 다가갔다. 눈에서는 시퍼런 안광이 흘러나왔다.

야옹!

루시는 다시 울음소리를 내면서 파블리나에게 펄쩍 뛰어올랐다. 얀과 파벨은 물론 실내에 들어온 다른 고양이 수십 마리도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런!”

파블리나는 다시 연기처럼 변하면서 천장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문 쪽으로 날아가더니 정원으로 빠져나갔다.

야옹! 야옹! 야옹! 크앙!

고양이 수백 마리가 연이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중 일부는 싸움을 할 때처럼 그르렁거리기도 했다. 루시는 파블리나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어디로 달아났는지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 하얀 액체 몇 방울이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루시는 다른 고양이들을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야옹!

고양이들은 그녀의 울음소리가 끝나자마자 슐티소바 거리 곳곳으로 흩어졌다. 한 마리씩 달려간 것은 아니었다. 10~20마리씩 무리를 지어 달려갔다.

루시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고양이들을 지켜보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얀과 파벨은 꽁꽁 얼은 지니의 온 몸을 핥고 있었다. 지니는 신음소리를 냈다.

“끄응!”

루시는 허공으로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마루에 내려온 고양이는 어린 소녀로 바뀌어 있었다.

“지니! 괜찮니?”

루시는 두 손으로 지니의 팔다리를 쓸어주었다. 얼굴과 몸통도 쓸어주었다. 얀과 파벨은 계속 그의 몸을 핥았다.

“끄응!”

지니는 한참 뒤에야 다시 신음소리를 냈다.

“냉기가 많이 빠진 모양이야. 이제 살 것 같아.”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루시는 지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지니는 힘들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런데 네가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온 거니?”

지니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루시의 등장을 궁금하게 여겼다. 루시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가 돌아간 뒤에 안드레이가 걱정을 많이 했어. 분명히 켈리가 찾아갈 텐데 너희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그래서 내가 자청했지. 며칠 동안 슐티소바 거리 일대를 순찰하겠다고. 오늘 밤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얀과 파벨이 아주 간절하고 애처롭게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너에게 큰 일이 난 걸 알고 달려왔지.”

지니는 얀과 파벨을 쳐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얀과 파벨을 알고 있었던 거야?”

야옹!

두 고양이가 지니의 말에 대꾸하듯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700년 동안 고양이 겸 유령으로 살고 있어. 그 덕분에 프라하의 모든 고양이를 다 알게 됐어. 우습지만 내가 고양이 대장인 셈이야. 프라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어지간한 일은 다 알고 있어. 그 덕분에 안드레이와 고양이 사이에 연결고리를 하고 있지. 안드레이가 나를 유령여행사에서 살게 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

지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아버지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루시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단순히 기절한 거니까. 내일 아침이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어날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못 할 거야.”



                    

이전 09화 마법사 켈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