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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ug 28. 2022

팔찌

마음이 착잡해진 은석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원 쪽 창문으로는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다. 반대쪽 절벽 방향의 창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네타는 식탁을 대충 정리한 다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석과 지니는 그 뒤를 따라갔다. 둘은 호우스카 성에서 하루 자고 가기로 했다. 은석은 단체관광객을 보낸 덕분에 다음 일정이 시작될 때까지 이틀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 정도 더 지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는 성을 더 둘러보면서 아내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다.

2층에는 방이 세 개였다. 맨 앞쪽 방에는 아주 오래된 가구가 있었다. 가구 안에는 특이한 옷이 여러 벌 들어 있었다. 아주 긴 하얀 색 천이 서너 필이었고, 양털로 짠 외투도 보였다. 올리브를 반으로 자른 것 같은 모자도 두 개였다. 긴 황금색 작대기도 두 개 있었다. 

옆방에는 지름이 1m 정도 되는 큰 화로가 보였다. 높은 대리석 제단 위에 놓인 화로는 푸르스름한 게 청동 같았다. 세월의 때가 잔뜩 끼어 아주 오래돼 보였다. 화로 옆면에는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여인들과 옆에서 그녀들을 지켜보는 고양이 무리가 새겨졌다. 구름 위에서 여인들과 고양이들을 내려다보는 신의 모습도 새겨졌다. 화로 아래에는 고양이 발처럼 생긴 다리 세 개가 달렸다. 옆에는 기괴한 형태의 사람 얼굴이 새겨진 손잡이가 네 개 붙었다. 

지니와 은석이 밤을 지낼 방은 맨 안쪽이었다. 그곳에는 여성 취향의 분홍색 2층 침대가 놓여 있었다. 

아네타는 사위와 손녀를 위해 직접 잠자리를 정리해주었다.

“루드밀라가 집에서 나가기 전까지 사용하던 방이라네. 가끔 블라트체 시내에 사는 고모가 자고 갈 경우가 있어 2층 침대를 가져다둔 것이지.”

은석은 방 옆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침대 1층에 바로 뻗어버렸다. 등을 대기가 무섭게 그의 코에서는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니는 침대 왼쪽에 놓인 책상 의자에 앉았다. 옆에는 큰 창이 달려 있었다. 이미 해가 진 지 오래여서 창밖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한참이나 밖을 내다보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다.

‘이 방이 엄마가 태어나 자란 곳이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져.’

지니는 크게 하품했다. 아직 저녁 8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꽤 피곤했다. 그는 샤워를 하고 침대 2층에 올라가 자기로 했다. 욕실은 꽤 커서 프라하의 집에 있는 지니의 방과 크기가 비슷할 정도였다. 

지니는 엄마가 어릴 때 이 욕실에서 샤워를 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그를 직접 씻겨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물은 엄마의 포근한 손길 같았다. 여기서 샤워를 하고 엄마가 누워 자던 침대에 올라가 잠들면 꿈속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지니는 샤워를 마치고 큰 수건으로 몸을 가볍게 닦았다. 한쪽 구석에 걸려 있던 분홍색 잠옷을 갈아입었다. 이 잠옷도 엄마가 어렸을 때 입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는 상쾌해진 마음으로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뿌연 수증기가 그보다 한 걸음 먼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때문인지 욕실 앞은 눈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려져 있었다.

지니는 문지방을 넘다 그 자리에 서야 했다. 다시 살펴보니 욕실 수증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방금 욕실에 들어가기 전과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금 욕실 앞의 풍경은 바뀌어 있었다. 눈앞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온통 어두컴컴했기 때문이었다.

지니는 아빠가 자고 있을 엄마의 옛 방이 있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도 어둠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대쪽을 쳐다보았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야 하는 자리였지만 그마저 어둠에 덮여 있었다. 그는 덜컥 겁이 났다.

“방금 저기에 방이 있었는데….”

지니는 한걸음도 앞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겁에 질린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너무 어두컴컴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 어디가 바닥인지 어디가 계단 난간인지 알 수 없었다.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소리 같기도 했고,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반짝이는 별 같은 하얀 빛이 멀리서 다가왔다. 빛은 빠른 속도로 접근하더니 지니 앞에서 멈췄다. 빛은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고양이로 변했다. 온 몸이 노란 고양이였다. 황금색이 아니라 그야말로 해바라기처럼 진짜 노란색이었다. 그가 중간세계에 갔을 때 몸에서 퍼져나간 것과 똑같은 색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희한한 색을 가진 고양이가 있었다니!’

야옹!

고양이는 지니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밝은 노란색 빛이 나와 주변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그제야 어둠이 사라지고 2층 복도가 보였다. 고양이는 복도를 지나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갔다. 

‘따라오라고 하는 거구나.’

지니는 고양이의 뒤를 따라갔다.

고양이는 1층 구석의 작은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바깥으로 긴 창이 달려있고 벽에는 안으로 움푹 들어간 작은 벽감들이 새겨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가로, 세로 1m 정도 되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밑에는 독특한 문양이 수놓인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고양이는 두 발로 양탄자를 가볍게 두들겼다. 

탁탁!

테이블이 옆으로 스르르 밀려나고 양탄자는 저절로 둘둘 말렸다. 양탄자 자리에는 큰 구멍이 하나 보였다. 울퉁불퉁한 게 일부러 뚫은 것 같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생긴 구멍 같았다. 구멍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선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벽에는 많은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끝 부분에는 노란색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지니가 마지막 계단을 밟고 왼쪽으로 돌아서자 둥근 모양의 건물이 나타났다. 두 줄로 된 열주 회랑이 에워싼 건물이었다. 신전 같기도 하고 교회 같기도 한 형태였다. 

건물 주변은 온통 캄캄한 어둠으로 싸여 있었다. 가끔 이상한 동물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지니는 어둠이 중간세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은은한 노란색 빛이 가득 찬 열주 회랑 뒤로 큰 문이 보였다. 안에서는 아주 밝은 하얀색 빛이 새어나왔다. 지니는 열주 회랑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열주 회랑 뒤쪽에는 하얀 대리석이 2단으로 낮게 깔려 있었다. 그 위에는 높이와 지름이 1m 정도 되는 화로가 보였다. 천장도 아치형으로 된 대리석이었다. 화로에는 불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무가 제대로 들어있지 않아 곧 꺼질 것 같았다.

‘낮에 2층에서 본 화로와 똑같아. 불이 약한 걸 보니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모양이구나.’

화로 옆에 독특한 옷차림을 젊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하얀 색 베일을, 몸에는 긴 천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다. 천은 상체를 두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긴 치마처럼 두 다리까지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땅에 질질 끌릴 정도여서 몇 걸음만 걸어도 옷을 다 버릴 것처럼 보였다. 뒷모습만 봐서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지니에게는 무섭거나 두렵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지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지니가 왔구나.”

하얀 천을 두른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

화로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은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지니의 엄마 루드밀라였다. 

“엄마!”

지니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품에 푹 안겨 그냥 펑펑 울고 싶었다. 

휙~

어찌 된 일인지 지니는 엄마에게 안기는 것은 고사하고 엄마를 만질 수도 없었다.

“엄마~.”

지니는 엄마를 쳐다보며 당혹스러워했다.

“지니야!”

루드밀라는 슬픈 표정으로 딸의 얼굴을 쳐다봤다.

“엄마는 유령이란다.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5년 전에 죽지 않았니? 유령을 만질 수 없다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지니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낮이나 밤이나 늘 그리워하던 엄마가 눈앞에 서 있는데 손조차 잡을 수 없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지니야, 미안해. 나도 너를 안고 싶구나. 하지만 오래전에 정해진 세상의 규칙을 엄마가 바꿀 수는 없단다. 

네가 그렇게 계속 울음을 터뜨리면 엄마의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아.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두렴.”

흑흑거리던 지니는 울음을 참기로 했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설움이 북받쳐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루드밀라는 지니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가 살던 집에 처음 오니 기분이 어떠니?”

지니는 여전히 숨을 조금씩 흑흑거렸다.

“2층 어…엄마 침대에 누…누우니 정말 좋았어. 어…엄마 냄새가 나…나는 것 같았어.”

“네가 할머니를 만나고 2층에 올라가는 걸 엄마는 다 보고 있었단다.”

“엄마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고?”

“그럼. 엄마는 유령이라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몰래 볼 수 있지.”

지니는 엄마를 만난 곳이 어디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신전 안을 둘러보았다. 많은 대리석 조각상이 벽에 걸려 있거나 벽 앞에 세워져 있었다. 아주 험악하게 생긴 조각상도 있었고, 아주 착하고 온순하게 생긴 조각상도 보였다.

루드밀라는 목소리를 낮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는 오늘 할머니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

“응.”

루드밀라의 목소리는 착잡해졌다.

“엄마는 할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그걸 거부하고 집에서 나간 것도 알고 있겠지?”

“응.”

“엄마는 운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원래 주어진 수명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단다.”

루드밀라의 얼굴은 구슬프게 보였다. 

지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 부여받은 운명이 있단다. 쉽게 말하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지. 평범한 사람의 경우 노력에 따라 운명을 조금 바꿀 수 있단다. 하지만 엄마처럼 하늘의 뜻을 담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그럴 수 없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에 복종해야 돼. 엄마는 죽고 난 뒤에야 그걸 알았단다.”

지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할머니가 두 삼촌 이야기도 해 주는 걸 들었어. 그걸 기억하니?”

지니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큰 외삼촌은 유령과 싸우다 죽었어. 둘째 외삼촌은 그게 싫어 가출해버렸지.”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루드밀라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는 둘째 아들이 어딘가에서 살아있는 걸로 생각하시지.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기셔. 하지만 할머니가 모르는 게 있어.”

“그게 뭐야?”

“둘째 외삼촌도 이미 죽었어. 친구와 등산을 갔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절벽에서 떨어진 거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뒤의 일이었어.”

지니는 큰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물론 두 아들과 딸까지 할머니는 모든 가족을 잃어버린 것이란 말인가? 왜 이런 비극이 생긴 것이지?

“둘째 외삼촌이 죽었다는 걸 할머니에게는 절대 이야기해서는 안 돼. 너무 충격을 받아 쓰러지실지도 몰라.”

지니는 온순하고 부드러운 할머니의 얼굴과 목소리를 생각했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신다면 그에게는 친척이라고는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

“응. 절대 말하지 않을 게.”

루드밀라는 품에 손을 넣어 낯선 물건을 하나 꺼냈다. 크리스탈로 만든 화사한 팔찌였다. 은은한 황금색이 흐르는 게 매우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걸 받으렴.”

지니는 성 루드밀라가 건네준 팔찌를 살펴보았다. 앞쪽에는 날개를 단 고양이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고양이 조각은 너무 정교해서 살아있는 진짜 고양이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팔찌에서 뛰어나와 포효할 것 같았다.

“이건 뭐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손목에 차고 있던 거야.”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지니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엄마가 왜 내게 이걸 주는 거지?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유령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팔찌는 위원장을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이걸 손목에 착용하는 순간 위원장이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리더라도 영리한 지니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야?”

루드밀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은 너에게 달렸어.”

지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귀에 갑자기 복공판과 함께 지하로 떨어지던 엄마의 마지막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 입을 꼭 다물었다.

루드밀라는 재촉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지니를 그냥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는 시간이 1분 정도 흘렀다. 루드밀라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중간세계에 다녀온 적이 있었지?”

지니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아는지 의아했다.

“너희를 따라 인간세상으로 탈출한 유령도 있구나. 마법사 켈리라고. 벌써 유령 여러 명을 살해했구나.”

“그걸 어떻게 알아?”

지니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화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중간세계가 어떤 곳인지는 알지? 장례식도 못 치르고 무덤도 없는 유령이 사는 곳이라고.”

지니는 눈을 번쩍 떴다. 엄마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는 엄마 시신을 찾지 못해 제대로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다. 시신이 없으니 무덤도 만들 수 없었다. 가묘를 만들어 빈 항아리를 넣어두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무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세상을 떠난 엄마가 갈 수 있는 곳은….

“엄마도 중간세계에 있는 거야, 지금?”

루드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가 바로 중간세계란다. 네가 가본 곳과는 다른 곳이지. 여기는 내가 죽은 한국의 중간세계야.”

지니는 토르텐슨의 말을 기억했다. 유령은 죽은 장소를 벗어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중간세계도 죽은 장소와 연결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엄마는 영원히 여기 있어야 하는 거야? 그 끔찍한 곳에?”

루드밀라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영원히 시신을 찾지 못하고, 무덤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럼 시신을 찾아서 무덤을 만들면 엄마가 중간세계를 떠나 저승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거야?”

루드밀라는 지니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걸 말해줄 수는 없단다. 그건 중간세계의 규칙을 어기는 일이란다. 그렇게 되면 엄마는 중간세계 너머의 세계로 쫓겨나게 된단다.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르고 무덤을 만드는 건 온전히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야.”

“중간세계 너머의 세계란 게 뭐야?”

지니는 토르텐슨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서도 중간세계 너머의 세계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말하는 내용을 잘 생각해보면 중간세계보다 더 참혹한 곳인 것만은 분명했다.

루드밀라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말을 꺼냈다.

“엄마는 5년 전에, 할아버지는 3년 전에, 둘째 외삼촌은 1년 전에 죽었단다. 제각각 멀리 떨어져 있던 세 사람이 왜 하필이면 2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을까?”

지니는 처음에는 세 사람의 죽음에 연관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외삼촌은 사고로 죽었다. 큰 외삼촌과 할아버지는 유령과 싸우다 살해당했다. 네 사건은 어떤 연관성을 가진 것일까?

“네 분이 돌아가신 게 우연이 아니란 이야기야?”

루드밀라는 딸의 두 눈을 쳐다봤다.

“그것도 내가 말해줄 수 없단다. 그것도 중간세계의 규칙이야. 그것마저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알아봐야 해. 유령의 한은 살아 있는 사람만이 풀어줄 수 있어. 정답은 네 주변에 있단다. 네가 알고 있다는 걸 모를 뿐이야.”

지니는 집에 무엇이 있는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정문에서 시작해 거실과 방, 부엌, 화장실까지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하지만 도대체 정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지니의 귀에 루드밀라의 낮은 목소리가 들어왔다.

“저녁에 2층에 있는 화로를 보았니?”

“응. 아주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걸 봤어.”

“불이 타오르고 있었니, 아니면 꺼져 있었니?”

지니는 침대 방으로 걸어가면서 흘끗 본 화로를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불은 타오르지 않고 꺼져 있었다.

“꺼져 있었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외삼촌마저 죽는 바람에 화로의 불을 관리할 사람이 모두 사라졌어. 그래서 불이 꺼져 버렸지.”

“할머니가 불을 관리하면 되지 않아?”

“할머니는 유령관리인이 아니야. 그 말은 불을 관리할 자격이 없다는 거지. 할머니가 불을 피워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불은 반드시 유령위원회 위원장에 의해 지펴져야 하는 거란다.”

지니는 엄마가 왜 화로와 불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로의 불이 정말 중요한 거야?”

“화로는 단순히 난방을 하려고 만든 게 아니었어. 화로의 불은 유령에 맞서 인간세상의 평화를 지켜주는 기운이자 상징이지. 그래서 이 불을 ‘오헤니 미루’라고 부른단다. 평화의 불이라는 뜻이지. 불이 꺼지면 평화가 사라지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유령의 사악한 기운이 터져 나오게 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불이 꺼진 지 3년이 지났어. 유령의 사악한 기를 누르는 힘이 약해졌지. 켈리가 중간세계에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란다. 불을 서둘러 피우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도 몰라.”

지니는 엄마가 건네준 팔찌를 다시 살펴보았다. 팔찌가 반짝 하면서 빛을 발산했다. 어서 손목에 넣으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니는 주저했다. 팔찌를 차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팔찌를 손목에 끼우면 내가 위원장이 되는 거야?”

루드밀라는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야. 네가 팔찌를 찰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팔찌도 나중에 선택을 한단다. 네가 팔찌 주인 역할을 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깨져 버릴 거야.”

“깨진다고?”

“그래. 깨져버려. 그러면 팔찌는 새 주인을 찾을 때까지 나에게 돌아오게 돼.”

지니는 팔찌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렸다. 엄마도 자신처럼 팔찌를 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말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루드밀라는 입을 굳게 다물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지니가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리기만 했다. 그녀의 표정은 편안하고 온화하고 조용했다. 걱정하는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다. 

“결심했어.”

지니는 고개를 홱 들면서 다부지게 입을 열었다.

루드밀라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지니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지니는 팔찌를 들어올렸다. 팔찌에 양각으로 새겨진 고양이가 야옹 하며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지니가 착각한 게 아니라 정말 고양이가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팔찌를 손목으로 밀어 넣었다. 할아버지가 차던 것이라서 그런지 팔찌는 매우 넓고 컸다. 처음에 손목에 들어갔을 때에는 헐렁했다. 이대로 차고 다녔다가는 그냥 흘러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팔찌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번쩍!

늦은 밤에 어두운 방에서 휴대폰을 켰을 때처럼 팔찌에서 노란색 빛이 솟아났다. 빛은 조금씩 위로 올라가며 퍼지기 시작했다. 지니가 중간세계에 갔을 때 몸에서 흘러나온 빛보다 더 강하게 더 멀리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지니는 팔찌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목 안쪽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가 만진 부분은 팔찌에 새겨진 고양이 문양이었다.

크앙!

지니가 빛에 시선을 빼앗겨 있을 때 천지를 진동할 정도로 큰 고양이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지니는 처음에는 신전 바깥의 다른 곳에서 들리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고양이 소리는 팔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팔찌에서 퍼져나갔던 빛이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빛 너머에서 희미한 물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빛이 사라질수록 물체의 형상은 분명해졌다.

“고양이!”

빛 사이에서 나타난 물체는 초대형 고양이였다. 지니를 예배당 지하로 데려온 고양이처럼 온몸이 노란 털로 덮여 있었다. 놀라운 것은 고양이가 프라하 동물원에서 여러 번 본 사자보다 덩치가 크다는 사실이었다. 사자는 이 고양이에 비교하면 오히려 작은 고양이에 불과했다. 

야~옹!

고양이는 지니 앞에서 납작하게 엎드렸다. 지니는 중간세계의 유령 마을에서 괴물 부르달라크를 만졌던 일을 기억했다. 그렇게 사나웠던 괴물은 갑자기 온순해지면서 강아지처럼 꼬리를 쳤다. 고양이도 부르달라크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지니는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네 다리를 뻗고 엎드렸는데도 고양이의 머리는 지니의 머리와 똑같은 높이였다. 지니는 천천히 손을 뻗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옹!

고양이는 아주 길게 울음소리를 내면서 나는 듯이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지니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고양이의 행동에 놀라 몸을 멈칫하면서 위를 쳐다보았다. 한껏 올라간 고양이는 허공에 잠시 멈추더니 방향을 틀어 다시 지니를 향해 아래로 내려왔다. 

고양이의 두 눈에서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곧추세운 날카로운 발톱은 멀리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반짝였다. 내려오는 동작이 얼마나 빨랐는지 지니는 피하려고 몸을 움직일 순간적인 틈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앗!”

지니가 짧은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고양이는 그의 몸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몸을 꿰뚫거나 물어뜯은 것은 아니었다. 바람이 사람의 몸을 스치듯 그냥 단순히 그의 몸을 훑으면서 안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야옹!

번쩍! 

고양이가 지니의 몸 안에서 울음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팔찌가 환하게 빛을 발산했다.

찌리링!

“앗!”

지니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에게서 처음에 받았을 때만 해도 헐렁하던 팔찌가 쪼그라들더니 지니의 손목에 달라붙어 버린 것이었다. 지니는 팔찌를 빼려고 밀어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말 피부와 밀착해버린 느낌이었다.

“엄마!”

지니는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루드밀라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돌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너와 고양이, 그리고 팔찌가 하나로 합쳐진 것에 불과하니까. 네 몸에 해롭거나 나쁜 것은 아니야. 나를 따라오너라.”

루드밀라는 신전 오른쪽에 달린 문을 열었다. 학교 기숙사 같은 긴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복도 양쪽에는 10여 개의 문이 달려 있었다. 

“복도 맨 끝에 작은 창고가 있단다. 거기에 가면 동그란 바구니가 보일 거야. 그걸 들고 오도록 해.”

지니는 엄마의 말대로 창고로 걸어갔다. 바구니에는 둥글게 잘 깎은 통나무와 역시 둥글게 잘 만든 검은 숯, 작은 집게가 들어 있었다. 

루드밀라는 다시 딸을 데리고 신전으로 돌아갔다.

“화로에 통나무와 숯을 넣을 수 있겠니?”

지니는 집게로 나무와 숯을 하나씩 들어 조심스레 화로에 집어넣었다. 아주 희미하던 화로의 불길은 조금씩 살아났다. 썰렁하던 신전에는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갔다. 

“자! 모든 게 정리됐어.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이야기해줄게. 팔찌에는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어. 그 힘이 어떤 것인지,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네가 스스로 하나씩 배워야 해. 이제 엄마는 가야 할 시간이야. 너무 슬퍼하지는 마. 앞으로도 가끔 너를 만나러 올 거니까.”

루드밀라는 신전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지니는 그 뒤를 따라가려고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였다. 엄마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주변은 다시 어두워졌다. 지니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욕실에서 나왔을 때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발아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탐조등을 비춰놓은 것처럼 제단 주변만 볼 수 있었다. 지니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야옹!

언제 다시 나타난 것인지 지니 뒤에 고양이가 서 있었다. 그를 예배당 지하로 데려온 고양이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몸 안으로 들어간 고양이와 똑같은 것 같기도 했다.

고양이는 지니의 눈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이 고양이의 눈은 사납고 매서워. 그러면서 부드럽고 친절하기도 해. 왜 그런 걸까?’

고양이의 눈 안쪽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동공인 줄 알았다. 그것은 조금씩 커졌고 앞으로 움직였다. 

야옹!

고양이의 커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눈에 있던 커다란 불덩어리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거기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환했던지 눈을 뜰 수 없었다. 지니는 고개를 돌리면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너무 눈부셔! 제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지니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빠가 창가에서 커튼을 걷었다. 높이 솟은 해는 창을 통해 환한 빛을 방으로 쏟아 부었다. 그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지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젯밤 할머니가 안내해준 2층의 방, 침대 2층이었다. 아빠는 커튼을 열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벌써 일어나 세수도 한 모양이었다. 

“꿈을 꾼 모양이구나.”

지니는 침대에서 내려가 창으로 갔다. 푸른 숲이 창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2층 복도가 보였다. 아래는 1층 거실이었다. 이번에는 욕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젯밤 샤워를 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등 뒤에서 햇살이 환히 들어와 온 집을 아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우리 아기! 이제 일어났구나!”

아네타가 2층으로 올라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환하게 웃으며 지니를 꼭 안아주었다. 지니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엄마가 포옹해주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벽에 걸린 대형 시계는 10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다.

“아빠도 일어나셨어? 내려가서 식사하자.”

은석이 방에서 나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지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는 벌써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의 눈은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빵을 향했다. 좋아하는 오렌지 주스도 보였다.

아네타는 빙긋 웃으며 옆자리에 앉아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를 떠주었다. 

지니는 빵을 한 점 뜯어 입에 넣으며 신기하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아네타는 정이 듬뿍 담긴 눈길로 지니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처음 만난 손녀의 가치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좋은 꿈이었니?”

“좋은 꿈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은석은 빵을 찢어 수프에 적셔 입에 넣었다.

“할머니께 설명해 드리렴.”

지니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뒤 아네타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밤에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고양이가 와서 저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갔어요.”

“어디로 간 거니?”

지니는 반대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미카엘 대천사 예배당? 혹시 그곳에 있는 동굴로 내려간 거니?”

“네. 횃불이 달린 계단이 연결돼 있던데요.”

“아!”

빵을 막 찢으려던 아네타의 손이 멈췄다. 손뿐만 아니라 그의 눈, 입, 그리고 온 몸이 다 멈춰버렸다. 마치 초강력 냉동고에 들어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얼어버린 물고기 같았다. 

“그곳이 어디에요?”

“다들 중간세계로 이어지는 구멍이라고 부른단다.”

“중간세계의 구멍이라고요?”

은석의 목소리가 커졌다. 

“13세기 무렵 블라트체에서 이상한 일이 자꾸 벌어졌어. 유령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붙잡아간 거지. 조사를 해보니 아까 그 구멍에서 밤마다 유령이 나온 거였어. 프르셰미슬 가문이 여기로 이사를 온 것은 그때였지. 조상들은 구멍 주변에 성을 쌓았어. 유령이 더 이상 밖으로 못 빠져 나가게 막으려던 것이었어. 그 위에는 예배당을 지은 거야. 구멍에 함부로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게 막으려는 거였지. 남편은 일 때문에 구멍을 수시로 들락거렸어. 나는 무서워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이 아이가 갔다고 하니….”

은석은 믿기 힘든 이야기에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렸다. 

“거기서 엄마를 만났어요.”

아네타는 이번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엄마를?”

“네.”

“엄마가 뭐라고 하던?”

지니는 빵을 뜯어 수프에 찍었다. 어제도 그랬지만 제법 짭짤한 게 입맛에 맞았다. 엄마가 왜 이 수프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에게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했어요.”

아네타와 은석의 시선이 지니의 얼굴로 쏠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지니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엄마는 운명을 거부해서 비극을 맞은 거라면서 너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아네타의 두 눈은 왕방울 만하게 커졌다. 가슴은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목이 타는 듯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른 일은 없었니?”

지니는 별 생각 없이 손목을 들어올렸다. 

“엇!”

꿈에서 엄마가 주었던 팔찌가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살갗과 달라붙어 도무지 떼어낼 수 없었다. 지니는 할머니와 아빠에게 손목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동시에 반응했다.

“이게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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