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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ug 26. 2022

아네타

지니는 운전자 옆 좌석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던 것인지 덜컹거리는 자동차 안에서도 전혀 깨지 않았다. 

차창 양쪽은 푸른 숲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숲 사이로 밀이 자라는 들판이 보였다. 빨간 지붕이 달린 작은 성도 지나갔다. 늦은 오후여서 해는 서서히 서쪽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은석은 지니와 함께 아내의 고향인 블라트체로 가는 중이었다.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80km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그는 프라하에서 여행 안내인을 오래 했지만 블라트체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블리트체는 프라하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벌써 40분 이상 달려왔으니 이제 거의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머리가 아프구나. 왜 이렇지?’

은석은 간밤에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지니와 아내 이야기를 나눈 것까지는 생각이 났지만 언제 어떻게 자러 갔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거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경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의 머릿속으로 5년 전의 장면이 구름처럼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사고가 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루드밀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건설회사와 소방서가 중장비는 물론 많은 인력을 동원해 그녀가 떨어진 지하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소방서장은 은석에게 탄식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네요. 지하로 꺼져버린 것인지, 아니면 증발해버린 것인지 도무지 찾을 수 없어요. 소방관 생활 30년에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건설회사는 아주 곤혹스러워 했다. 어서 시신을 찾아야 지하철 공사를 재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무한정 시신만 찾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물론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못했다. 희생자 시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공사를 재개했다가는 쏟아지는 비난을 견딜 수 없을 게 뻔했다. 은석도 이런 건설회사의 속사정을 잘 알았다. 그는 속만 태우고 있는 건설회사 이사를 만났다. 

‘일주일만 더 수색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시신이 나오지 않는다면 포기하는 데 동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은석이 딸을 데리고 한국을 떠난 것은 포기 동의 각서를 써주고 1년 뒤였다.

루드밀라의 고향 집은 블라트체 외곽의 산꼭대기에 있는 호우스카 성이었다. 이곳은 대중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프라하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는 없었다. 자동차를 몰고 가든지, 블라트체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택시를 갈아타는 수밖에 없었다.

은석은 블라트체로 출발하기에 앞서 아침 일찍 장인, 장모 집에 전화를 걸었다. 5년 전 아내가 건네준 전화번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장모였다. 그녀는 루드밀라의 남편이었다는 은석의 말을 듣고 놀란 눈치였다. 딸이 죽었다는 대목에서는 한동안 말문을 잇지 못했다. 입을 막고 나지막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은석은 장모의 반응에 가슴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내가 붕괴사고로 죽던 날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손녀가 있다고 말하자 장모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은석은 약속을 잡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더 붙들고 있다가는 그도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았다.

호우스카 성은 아주 낡아 보였다. 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인지 출입구 철문은 물론 담벼락에도 담쟁이넝쿨이 어지럽게 덮여 있었다. 주변은 물론 성 가운데의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지니는 성 근처로 다가갈수록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마치 중간세계에 들어가기 전에 네루도바 거리의 성모 마리아 성당 지하에 있는 검은 문에서 흘러나오던 차가운 바람과 비슷했다. 다만 검은 문의 경우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었다면 성에서는 경외스러운 느낌이었다.

성 바깥에 아주 늙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지니는 한눈에 엄마의 엄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은석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강은석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는 지니입니다. 강지니.”

할머니는 지니의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였다.

“네 얼굴에 루드밀라가 들어있구나. 정말 똑같구나.”

할머니의 얼굴을 본 지니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엄마가 들어있었다.

“나는 아네타일세. 아네타 말리코바. 루드밀라의 엄마라네.”

아네타는 아주 지치고 슬퍼 보였다. 외롭고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은석은 장모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표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수년 동안 만나지 못한 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갑자기 들었는데 어떤 엄마가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장인 어르신은 어디 계십니까?”

은석은 호우스카 성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장인 이야기를 꺼냈다.

아네타의 얼굴 한쪽 구석에 괴로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네. 벌써 3년이 지났군.”

은석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장인은 사라진 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힘들게 인생의 마지막을 살다 눈을 감았다. 딸을 다시 만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네타는 지니의 손을 잡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호우스카 성은 아주 폐쇄적인 구조였다. 성의 3개 방향은 절벽이었다. 남쪽 방향만 편평한 땅이었다. 성은 정사각형의 정원을 ‘ㅁ’ 모양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이뤄졌다. 출입구는 방금 지나온 곳 하나뿐이었다. 녹색으로 칠한 문에는 빨간색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호우스카 성을 에워싼 네 방향의 건물은 모두 3층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도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곳만 막으면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었다. 성 가운데의 정원은 돌로 덮여 있었다. 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정원 가운데에는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가 있었다.

아네타가 지니와 은석을 안내한 곳은 1층의 안쪽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먼 길을 달려온 둘을 위해 식사부터 대접하려는 모양이었다. 식당 한쪽 벽에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조리대가 설치돼 있었다. 가운데에는 금실로 수놓은 덮개를 씌운 의자 4개가 놓여 있었다. 식탁에도 금실로 수놓은 식탁보가 깔려 있었다. 식당 벽에는 온갖 기괴한 형상의 조각이 붙어 있었다. 괴물 같기도 했고 유령 같기도 했다. 

“저건 가고일일세. 어둠의 힘을 막아주는 부적이지. 성에 들어온 유령은 벽에 붙은 가고일을 보고 놀라 달아나게 돼.”

지니와 은석이 놀란 표정으로 벽에 붙은 가고일을 둘러보는 걸 눈치 챈 아네타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녀는 여전히 벽을 둘러보는 은석과 지니를 곁눈질하면서 수프인 굴라시를 식탁에 놓았다.

지니는 사실 너무 피곤한 탓에 음식을 먹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가 좋아했다는 굴라시를 보니 맛을 보고 싶어졌다. 약간 매콤하면서 신 맛이 나는 게 입맛에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이 수프를 정말 좋아한다고 했어요. 아빠도 드셔보세요.”

처음 보는 손녀가 굴라시를 먹으며 딸 이야기를 꺼내자 아네타는 더 슬픈 모양이었다.

“루드밀라가 굴라시 이야기를 자주 한 모양이구나.”

“엄마는 늘 국물 음식을 좋아했어요.”

아네타는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석의 얼굴을 쳐다봤다. 

“땅이 꺼져 생매장 당했다고 그랬지?”

은석은 그날을 회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내의 어머니에게 사고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지하철 공사장에서 복공판이 무너졌습니다.”

“사고가 나기 전부터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줄 수 있을까?”

은석은 식당에서 밥을 먹던 일부터 이야기했다. 하얀 굴라시인 곰탕을 먹은 일, 식당 주인이 뼈를 고다가 불을 꺼뜨린 일, 루드밀라가 걸어가다 넘어져 머리에 맨 띠가 떨어지고 배지가 부서진 일, 그리고 지하철 공사 중인 복공판 위를 걸어가다 사고가 난 일,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시체를 찾지 못한 일 등을 차례대로 알려줬다. 

“지니도 루드밀라와 함께 지하로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답니다. 철제 기둥 하나가 복공판 사이에 끼어 무너지지 않고 흔들흔들 달려 있었습니다. 지니의 옷이 그 기둥 중간의 뾰족한 부분에 걸린 겁니다. 1시간 뒤 구조팀이 달려올 때까지 지니는 기절한 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멍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지니를 보고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답니다.”

지니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네타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어린 손녀를 가슴에 꼭 껴안았다. 

“너마저 죽었다면 이 할머니의 가슴이 무너졌을 거야.”

아네타는 지니를 껴안은 채 말을 계속했다.

“루드밀라가 결혼하기 전이나 후에 우리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

“아내는 한 번도 가족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을 거야. 당연하지. 가족 내력이 싫다면서 떠난 아이니까.”

은석은 아직까지도 아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부모가 없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혼자 살았고 대학교도 독학으로 졸업했다고 했다. 

은석도 부모가 없는 고아였다. 누가 부모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묻는 걸 가장 싫어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단어는 ‘부모’였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아내가 왜 집을 나간 겁니까? 이렇게 훌륭한 가문의 딸이 가출해서 고아처럼 행세한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네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한 바퀴 돌자 우울하고 슬펐던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나는 그 아이를 이해한다네.”

아네타는 손녀를 쳐다보았다. 아주 귀여우면서 똑똑한 얼굴이 어릴 때 루드밀라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식당 한쪽 구석에 세워놓은 액자를 갖고 왔다. 액자에는 지니 또래 소녀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엄마!”

지니는 사진을 보자마자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은 은석도 마찬가지였다. 사진 속의 소녀는 지니와 정말 닮아 있었다. 

“루드밀라가 열세 살 무렵 사진이라네.”

아네타는 액자의 사진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정말 용감하고 현명한 아이였지.”

은석은 액자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내가 액자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루드밀라가 자네에게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였을 거야. 먼저 자네가 믿지 않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겠지. 나라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화부터 냈을 거야. 사람을 놀리는 거냐고. 자네로부터 핀잔을 받는 것은 물론 자칫하다가는 놓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겠지. 두 번째는 설사 자네가 믿어준다 하더라도 너무 부담스러웠을 거야. 이 남자를 자기의 운명 속으로 데리고 오는 게 너무 무서웠을지도 모르지.”

은석은 루드밀라와 연애하던 때를 가만히 돌이켜보았다. 아내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주저주저하다가 끝내 입을 다문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당시에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해도 자네는 믿지 못할 거야. 너무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거든.”

은석은 아내가 왜 가출했는지, 그리고 왜 죽는 순간까지도 그걸 비밀로 했는지 정말 알고 싶었다. 그는 장모의 입만 쳐다보았다.

“자네는 유령이라는 존재를 믿나?”

아네타의 입에서 엉뚱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물론 지니는 이미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은석의 사정은 달랐다. 

“유령이라니요?”

아네타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세상에는 유령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네.”

은석은 장모의 말을 듣고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네타가 그 이후 한 시간 가까이 들려준 이야기는 유령과 성 루드밀라, 그리고 유령위원회에 관한 것이었다. 안드레이가 지니와 두 아이에게 해준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장모의 긴 설명을 들은 은석은 혼란스러웠다. 장모가 놀리는 건 아닐 텐데 왜 갑자기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군요.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루드밀라의 가출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아네타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말을 이어갔다.

“자네 장인은 유령위원회 위원장이었다네. 유령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최고 책임자였지. 당연히 편안하고 쉬운 자리는 아니었어. 때로는 유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 때로는 유령과 싸워야 했어. 어떤 때에는 유령이 사는 중간세계에 가서 유령의 지배자와 담판을 짓기도 했지.”

은석으로서는 설상가상, 첩첩산중이었다. 그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 장모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급기야 은석은 장모가 혼자 오래 산 탓에 정신이 혼미해진 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휴!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가 아닌가요. 그런데 중간세계라는 건 또 뭔가요?”

“그건 저도 알아요.”

은석의 말에 대답을 한 건 뜻밖에 장모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 얌전히 앉아 할머니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지니가 한 말이었다.

은석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네가 안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갈수록 첩첩산중이구나.”

지니는 아빠의 대꾸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할머니만 주시했다.

아네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손녀를 쳐다보았다.

“얘야!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중간세계를 어떻게 안단 말이니?”

지니는 눈을 말갛게 뜨고 며칠 전 중간세계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곳에 가봤거든요.”

은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간 화가 난 모습이었다. 허무맹랑한 장모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견디기 힘든 상황인데 딸까지 어처구니없는 말로 가세하니 짜증이 났다.

“지니야! 너는 또 왜 이러니?”

지니는 그동안 벌어졌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학교에서 열렸던 유령 특강에서부터 안드레이의 빨간 수첩, 성모 마리아 성당의 검은 문, 중간세계와 목 잘린 유령 토르텐슨, 그리고 클레멘티눔의 유령위원회 이야기였다. 마법사 켈리가 탈출했다는 부분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블라트체에 오기 전날 밤에 일어난 사건도 설명했다.

은석은 일어선 채 눈만 끔벅거렸다. 너무 당혹스러울 경우에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평소에 집이었다면 딸이 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스갯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장모가 유령은 물론 유령위원회, 중간세계라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다음이었다. 지니가 털어놓은 말은 앞뒤가 완벽하게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장모의 이야기와 대조해도 100% 일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전날 밤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걸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니의 말을 받아들이면 모든 게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니야!”

나지막하게 딸의 이름을 부르는 은석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네타는 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곳에서 다른 일은 없었니?”

지니는 노란색 빛을 생각했다.

“할아버지 성함이 야로미르가 맞나요? 야로미르 프르셰미슬.”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지니는 중간세계에 갔을 때 몸에서 노란색 빛이 나왔다고 털어놓았다. 목 잘린 유령 토르텐슨이 그걸 보고 야로미르라는 이름을 알려주었다고 덧붙였다.

“노란색 빛이 네 몸에서 흘렀다고?”

“네.”

아네타의 얼굴에는 돌연 기쁜 빛이 화려하게 너울졌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딸이나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래. 맞아, 맞단다. 네 할아버지 성함이 야로미르야. 야로미르 프르셰미슬. 유령위원회의 마지막 위원장.”

아네타는 지니를 꼭 껴안았다. 손녀의 몸에서 잃어버린 딸 루드밀라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손녀가 아니라 딸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너는 지니가 아니라 루드밀라 같구나. 딸이 네 몸을 빌려 환생한 것처럼 느껴져.”

아네타는 지니의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졌다. 10여 년 만에 인생의 즐거움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녀는 희기가 도는 눈빛으로 은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유령위원회 위원장은 선출하는 게 아니라 유전적으로 상속되는 거라네. 아버지가 위원장이면 자식 중에서 한 명이 그 자리를 맡게 되는 거지. 장남이나 장녀가 반드시 위원장 자리에 오르는 건 아니야. 위원장은 타고 나는 거라네. 자식 중에서 유령을 관리하고 통제할 능력이 가장 뛰어난 아이가 자연스럽게 위원장 자리에 오르는 거지.”

아네타는 액자에 든 루드밀라의 사진을 다시 쳐다보았다.

“사실 우리 부부에게는 루드밀라 말고 아들도 둘이나 있었어. 야로미르는 처음에는 그 아이들에게 유령을 통제하는 기술을 가르치려고 했지. 그런데 불행하게도 둘 다 그런 재목이 아니었던 거야. 큰 아이는 유령과 싸우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말았어. 둘째 아이는 유령이 무섭다며 아버지에게서 훈련을 받지 않으려 했지. 그 아이는 스무 살을 넘어서자 집을 나가버렸어. 자기는 유령위원회 위원장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지니는 마법사 켈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든 유령이 토르텐슨처럼 착한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유령을 다루는 일은 위험한 게 틀림없었다. 둘째 외삼촌이 무서워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은 결국 마지막 남은 루드밀라에게 관심을 돌렸어. 놀랍게도 그 아이는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었어. 아버지가 가르쳐주는 모든 걸 손쉽게 배운 거야. 게다가 유령을 손쉽게 관리하고 통제하곤 했지. 남편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새 위원장은 딸이라는 걸 알게 된 거야.”

은석은 마치 망부석처럼 굳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충격적인 말을 연거푸 듣다 보니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었다.

“루드밀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카를대학교에 진학했어. 거기서 인문학을 전공했지. 그런데 졸업반이던 어느 날 갑자기 딸은 아버지에게 유령과 맞서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어. 자기는 그런 일로 평생을 보낼 수 없다는 거였지. 자기의 인생을 찾겠다는 거였지. 그리고 며칠 뒤 편지 한 통을 남긴 뒤 가출해버린 거야.” 

지니는 엄마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궁금해졌다.

“무슨 나쁜 일이 있었나요?”

아네타의 얼굴빛이 갑자기 흐려졌다. 

“루드밀라가 대학교에 다닐 때 사귀던 남자친구가 있었어. 서로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지. 학교를 졸업하면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했어. 그 남학생이 이곳으로 여러 번 놀러오기도 했단다. 물론 우리 집안의 내력을 그때까지는 몰랐어. 루드밀라는 졸업하기 전 겨울방학 때 남자친구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놨어. 그 학생은 루드밀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지. 농담이나 장난이라고 생각한 거야. 루드밀라는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모든 걸 다 이해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충격을 받거나 배신감을 느낄 거라고 판단한 거야. 루드밀라는 어느 날 밤 유령을 만나러 갈 때 남자친구를 데려갔어. 남자친구는 엄청나게 놀랐다고 하더구나.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혼절해서 며칠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고 했어. 그리고 루드밀라에게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이별을 선언했대. 딸은 이 일 때문에 심리적으로 혼란에 빠졌어. 그리고 졸업한 뒤에 가출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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