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소로의 좁은 골목에는 희미한 불빛만 흘렀다. 번호가 붙은 여러 집의 문 앞에 달린 작은 등잔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평소에는 노란색을 띠었지만 오늘따라 웬일인지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분위기가 영 삭막한데요.”
마렉은 오싹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곳곳에서 유령을 여러 차례 만났고, 심지어 프라하 성을 담당하는 카롤리나가 바쁠 때면 황금소로에 대신 오곤 했지만 오늘처럼 기분이 나쁜 경험은 처음이었다. 금세라도 등 뒤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어 목을 조를 것 같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여기서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군.”
평소 같으면 자정을 알리는 성 비투스 대성당의 종소리가 울린 이후 황금소로에는 활기가 넘쳤다. 중간세계에서 하루 종일 숨죽이고 있던 유령들이 골목길을 오가며 시끌벅적하게 소동을 벌이곤 했다. 물론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이보다 넓게 느껴지고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공간은 없었다. 오늘은 벌써 새벽 3시가 다 된 시간인데도 단 한 명의 유령도 보이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안드레이는 문이 닫힌 여러 집의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유령이야 마치 소리가 지나는 것처럼 벽이나 유리창을 마음대로 지나다닐 수 있지만 인간인 그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사장님, 저기 앞에 바닥을 보세요.”
마담 테베스가 일했던 14번 집 앞에 젤리가 엎질러진 것 같은 흔적이 보였다. 작은 젤리가 아니라 아주 큼지막한 덩어리였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떨어진 것은 젤리가 아니었다. 동강난 채 멀리 내팽개쳐진 머리가 보였다. 팔과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몸뚱이는 산산조각 나 있었다.
“연금술사 요제프로군.”
요제프는 루돌프 2세 황제 시대에 황금소로에 들어온 연금술사였다. 실험을 하다 독극물 연기를 마시는 바람에 그만 즉사한 유령이었다.
“누가 이랬을까요?”
“켈리가 우리보다 먼저 여기를 다녀간 모양이군. 14번 집에 살았던 마담 테베스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겠지. 요제프를 족쳤지만 대답을 안했거나, 모르니 죽여 버린 거야. 다른 유령은 그걸 보고 모두 달아나서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켈리가 그들을 찾았다면 답을 얻었거나 아니면 죽여 버렸을 테지.”
안드레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리보르 탑에서 그림자가 어슬렁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탑으로 걸어갔다.
“하나라도 살아남은 유령이 있다면 다행일 것이고.”
달리보르카라고 불리는 달리보르 탑은 15세기에 프라하 성을 보강할 때 만든 방어시설이었다. 나중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곳에 갇힌 죄수는 매일 고문을 당했다. 몽둥이로 맞는 것은 기본이었고, 팔다리 비틀기, 손톱발톱 뽑기 등 고문의 종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죄수들이 고통스럽게 내지르는 비명은 인근 마을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여기서 고문을 당하다 죽은 유령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 수가 워낙 많은데다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끔찍한지 다른 유령조차 무서워할 정도였다.
달리보르카에서도 유령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평소 탑에서 우글거렸던 유령들은 모두 어디론가 달아난 모양이었다. 안드레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면 유령들이 죽은 장소 주변에서 절대 벗어나서는 안 되는 규칙을 어기고 달아날 정도였을까?
“안드레이?”
안드레이와 마렉이 달리보르카 5층 꼭대기에서 막 내려오려고 등을 돌렸을 때였다. 뒤에서 공포에 질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달리보르카에 유일하게 달린 자그마한 창의 바깥쪽에서 희미한 회색 얼굴이 쑥 머리를 내밀었다.
“하인리히?”
회색 얼굴은 주변을 살피더니 탑 안으로 조심스럽게 흘러 들어왔다. 얼마나 놀랐던 것인지 유령이어서 원래 희끄무레한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유령은 오스트리아 교수였던 하인히리였다. 그는 은퇴한 뒤 황금소로로 이사 온 사람이었다. 연금술로 금을 만들려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지만 폭발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온몸에 화상을 입고 숨지고 말았다.
“왜 거기 숨어 있는 거예요?”
마렉은 눈을 껌벅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인히리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황금소로에 이제 아무도 없는 거야?”
“네, 산산조각 난 요제프만 있어요.”
“불쌍한 요제프!”
하인히리는 한손으로 콧물을 닦았다.
“무서운 자였어.”
안드레이가 그 말에 대답했다.
“아마 켈리일 겁니다.”
“켈리? 루돌프 2세의 총애를 받은 존 켈리?”
“네.”
하인리히는 켈리를 알고 있었다. 그가 황금소로에 방을 구해 힘겹게 연금술에 매달릴 때 켈리는 황제로부터 커다란 저택과 연구실을 하사받아 느긋하게 연구를 진행했다. 그가 살던 시대에 켈리를 모르는 연금술사는 없었다.
“내가 아는 얼굴과 다르던데.”
“중간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법까지 배웠더군요. 얼굴도 그래서 변했을 겁니다.”
“마법을 배웠다고? 유령이 어떻게?”
“그걸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알아봐야죠. 그 자는 중간세계에서 탈출했습니다.”
“켈리가 중간세계에서 탈출했다고? 어허! 그래서 요즘 중간세계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가?”
하인리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러 해 전부터 중간세계 곳곳에서 불이 나고 이상한 함성이 터져 나오곤 했어. 마치 폭동이 일어난 것 같았어.”
“무슨 일일까요?”
안드레이는 마렉을 흘겨보았다.
마렉은 가슴이 뜨끔했다. 켈리가 탈출한 이후 벌써 유령 3명이 살해당했다. 그도 다 아는 유령이었다. 모두 그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자가 여기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인리히는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자정이 막 지나 황금소로의 유령들이 모두 밖에 나왔을 때였어. 갑자기 낯선 유령이 나타난 거야. 아무도 그 자를 몰랐어. 나도 켈리인 걸 몰랐으니 다른 유령도 알 수 없었겠지. 한눈에 봐도 밝은 유령이 아니더라고. 켈리가 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왜 이렇게 변했을까? 어쨌든…. 그때 요제프가 14번 집 다락방에서 나왔지. 켈리는 갑자기 요제프에게 달려들더니 목을 졸랐어. 요제프는 옴짝달싹도 못 하더군. 힘이 어지간히 센 게 아니었던 거야. 켈리는 요제프에게 마담 테베스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어. 요제프는 숨을 컥컥거리면서 모른다고 했지. 안드레이는 마담 테베스가 누군지 알지?”
안드레이는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켈리는 요제프의 심장에 손을 집어넣더군. 우리는 뭐하는 짓인지 처음에는 몰랐지. 요제프는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더라고. 그자가 요제프의 정령을 쥐어짠 거야. 아무도 그를 구하러 갈 생각을 못했어. 우리가 대적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유령이었던 거야. 그자는 다시 마담 테베스에 대해 묻더군. 가방을 찾아야 하는데 마담 테베스를 만나야 한다는 거야. 너는 여기 사는 유령이니 그녀가 찾아온 걸 알지 않느냐고 다그치더군. 요제프는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고 했어. 그러자 그자는 요제프의 정령을 뽑아내고 박살내버리더군. 아! 불쌍한 요제프.”
켈리가 마담 테베스를 찾아 헤맨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녀를 찾는 목적이 가방에 있다는 것도 확실해졌다. 물론 그 가방을 왜 찾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왜 여기서 마담 테베스를 찾는 걸까요? 그 여자는 벌써 죽었는데.”
하인리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요제프는 정말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알아. 마담 테베스는 살아 있어.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10년 전에 다시 나타났거든. 정말 깜짝 놀랐지. 어떻게 된 건지 아직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어.”
“마담 테베스가 죽지 않았다고요?”
안드레이와 마렉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죽지 않았어.”
“그럴 리가!”
“두 사람 다 알다시피 카롤리나를 돕는 게 내 일이지. 유령이 규칙을 잘 지키는지, 말썽을 피우는 건 아닌지 살펴서 결과를 알려주는 거야. 그 덕분에 한 달에 한 번씩 낮에 세상에 나올 수도 있고 말이야. 10년 전쯤이었지. 이런 옷을 입고 대낮에 걸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22번 집 다락방에 숨어서 황금소로를 내다보고 있었어. 그런데 14번 집에서 마담 테베스가 걸어 나오는 거야. 정말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어.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어. 아무리 봐도 그녀가 맞더라고. 어깨에 고양이 한 마리가 얹혀 있었거든. 게다가 타조 깃털이 달린 큰 검은 모자를 썼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었어. 그렇게 독특한 여자를 까먹을 리가 없지.”
“그 이후에는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며칠 전에 다시 봤어. 똑같은 이유에서였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군. 아니 1945년에 마지막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어.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마담 테베스는 1945년 독일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이 끝난 뒤 프라하 독일군 사령부에서 발견한 반군 처형자 명단에도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프라하 외곽의 집단 처형장에서 총에 맞아 죽은 걸 봤다는 목격자까지 있었다. 그런데 마담 테베스가 살아 있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제프를 죽인 유령은 가방 이야기를 자꾸 했어. 마담 테베스가 가방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그 가방에 뭐가 들어있기에 그렇게 난리를 떠는지 알 수 없더군.”
“다른 유령들은 어디에 숨었어요?”
“요제프가 죽은 걸 보고 달리보르가 달려 나왔어. 원래 의협심이 강한 유령이잖아? 반군을 학살한 성주를 암살하는 바람에 붙잡혀 죽을 정도였으니. 그런 달리보르도 나쁜 유령의 상대가 되지 못했어.곧바로 달아났지. 나쁜 유령은 화를 내며 그를 쫓아갔어. 아마 달리보르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그 사이에 나머지 유령은 모두 도망갔어. 몇몇은 숲으로, 몇몇은 성 비투스 대성당에 숨은 것 같아.”
안드레이는 서둘러 중간세계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마담 테베스를 만나는 게 급했다.
“마담 테베스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녀를 만나야 켈리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녀를 두 번 본 건 모두 낮 12시 무렵이었어. 내 짐작이지만 아마 그때쯤 황금소로에 오는 모양이야. 왜 오는지는 모르겠어.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 얼굴이 아주 슬퍼 보이더라고.”
안드레이에게는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아들을 찾는 모양이지요.”
평일 오전인데도 황금소로에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다. 워낙 독특한 공간인 데다 유명한 이야깃거리가 흘러넘치는 덕분에 많은 사람이 이곳을 사랑했다.
“언제쯤 올까요? 정말 오기는 할까요?”
안드레이와 마렉은 14번 집 맞은편에 의자 두 개를 놓고 앉았다. 두 사람은 언제 올지 모르는 마담 테베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인리히가 낮 12시에 두 번 봤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무작정 그 시간을 전후해서 며칠간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얼른 만나야지. 그나마 다행인 건 켈리가 유령이어서 낮에는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점이지. 밤에는 그자가 우리보다 빠르지만 낮에는 사정이 달라. 어쨌든 낮에 모든 걸 다 파악해야 밤에 그자와 맞설 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카프카의 거처였다는 22번 집을 둘러보았다. 2층으로 올라가 중세시대 갑옷과 무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고문으로 악명 높은 달리보르카로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14번 집을 둘러보러 오는 사람은 적었다. 누가 들어가고 나오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흔을 앞둔 안드레이와 이제 겨우 삼십대 초반인 마렉이 다른 데로 움직이지도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 걸 힐끔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골목에 앉아 있는 사람은 둘 뿐이기 때문이었다.
마렉은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열두시가 가까웠다. 그는 답답한 듯 의자에서 일어나 골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중에는 차단기가 설치된 입구 앞에 가서 서성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사장님!”
마렉의 흥분한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안드레이는 그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 쪽에서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이 황금소로 안으로 걸어왔다. 다른 관광객들은 모두 그녀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게 어깨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았기 때문이었다.
“마담 테베스!”
안드레이는 혼자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반가운 기운이 흘러넘쳤다. 그는 마담 테베스가 14번 집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집 안에서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안드레이는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마담 테베스는 차단선을 넘어 창가에 놓인 책상에 앉아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문 앞에 서서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마담 테베스가 안드레이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은 14번 집 앞에 한 꼬마가 불쑥 나타나 장난스럽게 유리창에 코를 들이민 이후였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문 앞에 서 있는 안드레이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담 테베스!”
안드레이는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저를 아시죠?”
“페테르카 프루소바의 친구입니다.”
“페테르카?”
마담 테베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머리에 전쟁터로 끌려 나가며 울부짖던 어린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페테르카가 살아 있나요?”
안드레이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있나요?”
마담 테베스의 목소리는 다급하게 들렸다.
“제 집에 있습니다. 아드님을 보시려면 같이 가시면 됩니다.”
안드레이는 마담 테베스에게 14번 집에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마렉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밖에 서 있었다. 그녀가 나오는 걸 본 다른 관광객 두 명이 그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잘 있었나? 마렉!”
안드레이가 생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중간세계에서 탈출한 켈리가 예상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모두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한 힘이었다. 안드레이가 마담 테베스를 황금소로 출입구로 데리고 나갈 때 허공에서 들린 싸늘한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켈리!”
이상한 소리에 놀라 위를 쳐다본 마렉이 소리를 질렀다. 빨간색 지붕을 가진 집 위의 허공에 켈리가 떠 있었다. 며칠 전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물론 쿨이 그를 두 번째 보았을 때보다 훨씬 선명한 모습이었다. 그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내 생각에는 이 사람이 안드레이 사장이군. 옆에 계신 숙녀는 내가 그렇게 찾던 마담 테베스일 것이고.”
켈리는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낄낄대며 웃었다.
“이런 걸 손 안대고 코 푼다고 하는 모양이지.”
그는 허공을 서너 바퀴 휘돈 다음 안드레이 앞에 사뿐히 내려왔다.
“안드레이 씨, 반가워. 나를 위해 마담 테베스까지 손수 찾아주니 고맙기도 하고. 나는 마담 테베스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찾을까 고민했는데. 낄낄.”
안드레이와 마렉은 밧줄에 꽁꽁 묶인 것처럼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강력한 접착제가 붙었는지 입조차 열 수 없었다. 안드레이는 예상을 훨씬 앞서는 켈리의 마력에 속으로 경악했다.
켈리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안드레이와 마렉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켈리가 내려온 빨간 집 지붕 위로 떨어졌다. 둘은 그곳에 얹혀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14번 집 안에 들어갔던 두 관광객은 눈앞에 펼쳐진 무섭고도 놀라운 광경을 보고 덜덜 떨면서 달아나버렸다. 다른 집을 둘러보던 관광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는 비명을 지르며 달리보르카 쪽으로 뛰어가기도 했다. 순식간에 황금소로에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비명을 들은 출입구 직원 두 명이 황금소로로 달려왔다. 그들은 이미 지붕에 올라간 안드레이와 마렉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얼어붙은 듯 꼼짝 못하고 서 있는 마담 테베스와 마치 횟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온 몸이 회색인 남자만 볼 수 있었다. 둘은 이상한 모습을 한 켈리를 보고 흠칫했다.
“저 사람, 유령 퍼포먼스 하는 거야?”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너무 진짜 유령 같지 않아?”
켈리는 다시 둘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둘은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안드레이와 마렉이 앉아 있는 지붕을 넘어 담장 밖으로 떨어져 버렸다.
“귀찮은 녀석들 같으니.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방해하고 있어.”
켈리는 얼굴을 마담 테베스 앞으로 쑥 가져갔다. 아주 연한 향수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밝게 웃으며 머리를 약간 위로 들고 설레설레 흔들었다.
“음! 아주 좋은 향수군. 내가 살던 시절에는 이런 향수는 없었는데 도대체 이건 뭘까?”
켈리는 지붕에 얹힌 안드레이와 마렉을 곁눈질하면서 왼손을 마담 테베스의 머리에 집어넣었다. 마담 테베스는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무서운 일이 벌어진 탓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담 테베스! 너무 겁낼 것 없어.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몇 가지만 알면 돼. 당신 남편의 가방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면 내 일은 끝이야. 조금만 기다려.”
켈리는 마담 테베스의 머리에 손을 넣어 헤집었다.
“오! 저기 있군. 가방. 아! 그랬던 거군. 남편이 죽고 당신이 가방을 챙겼던 거야. 어! 가방을 여시는군. 뭐가 들었나? 그 영감 머리에서 본 것하고 비슷한데. 뭘 드시나? 노란 약? 그건 뭐지? 어쨌든 내겐 필요 없는 거야. 빨간 가루가 든 봉지를 찾아야 해. 어디 있나? 꽝! 가방을 왜 닫아? 다시 열어!”
켈리가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왜 이래? 내가 당신 머리를 들여다보는 게 싫은 거야? 그래서 가방을 닫았어? 좋은 말 할 때 여는 게 좋을 거야. 그래도 안 열어? 그렇다면 혼이 나 봐야지.”
켈리는 마담 테베스의 머리에서 손을 뺐다. 페테르카와 요제프에게 한 것처럼 심장을 쥐어짤 모양이었다.
“파지직!”
“앗!”
이상한 파장 음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켈리는 비명을 지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앞에서 파란빛 채찍이 흔들거렸다. 며칠 전 새벽에 쿨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채찍이었다.
“누가 나를 방해하는 거야?”
켈리는 눈을 씰룩이며 소리를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쿨의 친구인 지니와 리즈가 22번 집 앞에서 화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호우스카 성에서 돌아온 지니는 리즈에게 먼저 전화부터 걸었다. 성에서는 와이파이는커녕 휴대폰 전화조차 연결되지 않아 리즈가 여러 차례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낸 걸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리즈에게서 안드레이와 마렉이 마담 프루소바를 만나러 황금소로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온 것이었다.
켈리는 처음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러다 지니를 보더니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갑자기 반가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오! 너로구나. 중간세계에서 본 놀라운 소녀. 세상에 이런 행운이 또 있을 수 있나? 마담 테베스를 찾아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게 됐고, 게다가 너까지 나를 직접 찾아와주다니. 오늘은 손을 안 대고도 여러 번 코를 푸는군. 낄낄.”
켈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니와 리즈는 동시에 손전등 버튼을 다시 눌렀다. 파란빛 채찍 두 줄이 켈리의 다리를 향해 날아갔다.
켈리는 이번에는 채찍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채 채찍이 다리를 때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고통스럽다는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쿨의 집에서는 빛 채찍을 견디지 못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켈리는 눈에 시뻘건 핏발을 세우고 입에 야비한 웃음을 띤 채 두 아이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걸릴 게 아무 것도 없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태도였다.
당황한 리즈는 버튼을 눌러 채찍을 다시 휘둘렀다. 채찍은 켈리의 다리를 휘감았다. 켈리는 오른손으로 채찍을 붙잡아 힘껏 잡아당겼다. 채찍은 뚝 하며 끊어져 버렸다.
켈리는 리즈를 노려보며 여전히 낄낄거렸다.
“이제 그따위 채찍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어!”
“앗!”
켈리의 행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리즈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켈리는 오른손을 리즈 쪽으로 뻗었다. 리즈는 온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했다. 켈리는 뻗은 손을 가볍게 안쪽으로 접었다. 리즈는 공중에 떠오르더니 천천히 켈리 쪽으로 끌려갔다.
“리즈!”
지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쿨은 채찍을 쏘았을 때 켈리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달아났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켈리는 채찍 정도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일까?’
지니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리즈처럼 버튼을 눌러 채찍을 휘둘렀다. 상황은 리즈 때와 똑같았다.
켈리는 왼손으로 지니의 채찍마저 뚝 끊어버렸다. 켈리는 이번에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지니도 리즈처럼 허공에 떠올라 켈리 쪽으로 끌려갔다.
“헉!”
지니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방법이 없을까?’
지니의 머리에 갑자기 팔찌가 떠올랐다. 그가 기억해낸 게 아니라 팔찌가 스스로 머릿속으로 찾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팔찌? 이걸 사용하면 되나? 어떻게?’
지니는 엄마에게서 팔찌를 받았지만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팔찌에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앞으로 호우스카 성에 수시로 찾아오라고 말했다. 그러면 팔찌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거라고만 했다.
지니는 그날 밤 꿈에서 팔찌를 차던 순간을 생각해보았다. 팔찌를 만졌을 때 노란색 빛이 흘러나오고 고양이가 나타난 게 기억났다.
‘맞아! 팔찌를 만졌을 때 노란색 빛이 흘러나왔어. 중간세계에서 괴물들이 싫어하던 빛이었어. 그리고 나중에는 고양이가 튀어나왔지. 이게 효과를 낼 수 있으려나?’
지니는 일단 팔찌를 만져보기로 했다. 그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니는 꽁꽁 얼어붙은 것 같은 두 손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 얼마나 심하게 마법이 걸린 것인지 팔을 1cm 옮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팔을 움직였다.
“으읍~!”
지니의 입에서 용을 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초봄에 개울의 물을 덮은 얼음이 조금씩 녹을 때 들리는 굉음 같았다. 그의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은 바들바들 떨렸다. 팔을 움직이려고 온몸에 힘을 쓰는 바람에 다리는 바동거렸다.
켈리는 그런 지니를 보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봐야 소용이 없어. 내 마법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은 버려. 여기서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중간세계의 지배자께서 가능하면 너를 살려서 데려오라고 하셨거든.”
지니는 켈리의 조롱은 아랑곳 없이 팔을 움직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지니와 리즈가 켈리에게 끌려갈수록 두 팔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번쩍!
지니의 손목에서 노란색 빛이 터져 나왔다. 온힘을 다 쏟아 부은 덕분에 팔찌를 겨우 만진 것이었다. 빛은 순식간에 황금소로 골목을 벗어나 하늘로 치솟았다. 지니의 몸에서도 노란빛이 은근하게 흘러나왔다. 중간세계에서 어둠을 밝혀주었던 빛이었다.
툭!
빛이 나온 것과 동시에 지니는 땅으로 떨어졌다.
“노란빛!”
켈리는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에서 빤뜩빤뜩 시뻘건 안광이 비쳤다.
“빛이 나의 마법을 풀어버렸구나. 역시! 지배자께서 너를 꼭 붙잡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신 이유를 알겠구나. 하지만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해. 이따위 빛 하나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켈리는 왼손을 다시 들어 올려 지니에게 뻗었다. 그의 손에서 희미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주 차가운 얼음에서 솟아나는 냉기 같은 연기였다. 맨 앞쪽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해괴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의 얼굴 같기도 했고, 지니가 중간세계에서 목격한 괴물 부르달라크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기는 온 몸을 비틀면서 허공을 날아 지니에게로 달려갔다. 먹이를 포착한 뒤 순식간에 낚아채려는 뱀이 온 몸을 던지는 형상이었다.
퍼석!
켈리의 연기는 지니의 몸에서 퍼져 나온 노란빛 앞에 이르더니 밥솥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마법의 연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켈리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연기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눈이 까뒤집힐 정도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눈은 독기를 품고 날카롭게 번득였다. 그는 리즈를 허공에 매달았던 오른손을 내렸다.
쿵!
리즈는 그대로 땅에 떨어져 버렸다.
“리즈! 괜찮아?”
지니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리즈는 기절했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켈리는 오른손과 왼손을 동시에 앞으로 들어올렸다. 새하얀 얼굴에는 시뻘건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흉측한 핏줄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끄아아악!”
켈리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내뱉는 소리 같았다. 그의 두 손에서 다시 하얀 연기가 새어나왔다. 연기는 조금씩 덩어리지더니 이상한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상체는 늑대였고 하체는 뱀인 형상이었다.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늑대의 대가리에는 수십 개의 뱀이 달려 있었다. 뱀은 쉭쉭 소리를 내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하체의 끝부분 꼬리에도 긴 뱀이 달려 있었다. 늑대의 입에서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번득거렸다. 상체에 달린 두 발에는 발톱 수십 개가 붙어 있었다.
“가거라! 레르나의 히드라! 저 아이를 꽁꽁 붙들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켈리는 앞으로 들어 올린 두 손을 힘껏 뿌렸다.
크르릉! 쉬익!
켈리가 레르나의 히드라라고 부른 괴물은 빠르게 전진했다. 생긴 모양이나 덩치로 봐서는 느릴 것 같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지니는 손전등을 다시 꼭 붙잡았다.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손전등에서 나오는 채찍뿐이었다. 그는 손전등 버튼을 눌렀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빛 채찍이 손전등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채찍을 살펴보면서 놀라고 말았다. 방금 전에 사용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채찍이었다.
처음에 튀어나온 채찍은 파란색에 길이는 4~5m 정도였다. 지금 채찍은 아주 진한 노란색이었고 훨씬 더 길었다. 충분히 10m는 될 것 같았다. 길이를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채찍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줄어들고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모양과 굵기도 앞의 채찍과 달랐다. 이전 것이 단순히 가느다란 밧줄 같았다면 지금 것은 굵은 쇠사슬처럼 보였다.
“그…그게 뭐지?”
켈리도 지니의 손전등에서 튀어나온 채찍을 보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이런 빛 채찍이 어디서?”
지니는 주저하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는 입을 앙다물고 채찍을 힘차게 휘둘렀다. 공을 멀리 집어던지듯 온힘을 쏟아 부었다.
쌕!
채찍은 거친 소리를 내며 레르나의 히드라에게 날아갔다.
철썩!
펑!
채찍은 레르나의 히드라의 상체에서 늑대 대가리처럼 생긴 부분을 강하게 때렸다.
깨갱!
레르나의 히드라는 비명을 지르며 땅에 곤두박질쳤다. 대가리에 붙어 있는 뱀 몇 마리가 피를 뿌리며 떨어졌다.
지니는 다시 한 번 채찍을 힘껏 날렸다.
끄앙!
채찍은 이번에는 레르나의 히드라 허리 부분을 강타했다. 강도가 얼마나 셌던지 히드라의 허리는 순식간에 두 동강나고 말았다.
펑!
허리가 잘리면서 폭발음이 나더니 레르나의 히드라는 산산조각 나버렸다. 떨어져 나온 피투성이 살점이 황금소로 곳곳으로 날아다녔다.
“미…믿을 수가 없어! 어…어떻게 이런 일이?”
켈리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레르나의 히드라 살점을 하나 들어올렸다. 그리스에서 살던 레르나의 히드라는 난공불락의 존재였다. 누구도 이렇게 손쉽게 이 혼합괴물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켈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노란빛을 내는 소녀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제대로 맞설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처음에 황금소로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선명하고 진했던 그의 몸은 아주 연해졌다. 힘이 떨어지고 있는 게 확실하게 드러났다.
레르나의 히드라를 제압한 지니는 켈리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거친 소리를 내며 켈리에게 날아갔다. 마치 바닷가에서 거친 파도가 해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모양새였다.
펑!
채찍은 켈리의 허리를 힘껏 두들겼다. 대포가 터지는 소리가 황금소로에 울려 퍼졌다.
“악!”
채찍을 얻어맞은 켈리는 그대로 날아가더니 19번 집 벽에 쿵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이었다.
지니는 천천히 켈리에게 다가갔다. 유령 마법사여서 어떤 암수를 부릴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끄응.”
켈리는 신음을 내면서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어나서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비틀거렸다.
지니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다가선 뒤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이번에는 그의 다리를 향해 날아갔다.
“크헝!”
켈리는 산짐승의 입에서나 나올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채찍을 맞고는 그대로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 쿵 하며 땅에 떨어졌다.
지니는 그래도 조심하면서 접근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유령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지 아는 게 없었다.
“빨간 버튼을 누르렴. 그러면 켈리를 손전등에 가둘 수 있어.”
지붕 위에 갇힌 안드레이가 지니를 향해 고함을 쳤다.
‘맞아, 빨간 버튼이 있었지.’
지니는 마렉이 손전등의 빨건 버튼을 누르던 걸 생각했다. 중간세계에서 뜻하지 않게 빠져나온 토르텐슨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일이었다.
지니는 손전등을 살폈다. 파란 버튼 반대편에 빨간 버튼이 보였다. 그는 천천히 켈리에게 다가갔다. 아직 경험이 부족했기에 모든 일에 조심해야 했다. 그는 넘어진 켈리 근처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빨간 버튼을 눌렀다.
크아앙!
갑자기 달리보르카 안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이어 엄청난 눈보라와 강풍이 지니를 향해 날아들었다.
“앗!”
지니는 갑작스러운 눈보라를 피하려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보라가 몰아친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불과 3~4초 정도였다.
“켈리가 달아났어.”
지붕에 얹힌 마렉이 소리를 질렀다. 지니는 손을 내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죽은 듯 땅에 쓰러져 있던 켈리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벽 너머에서 잔혹하면서 끔찍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다시 돌아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