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긴 카를로바 거리에는 행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골목을 가득 메운 가게도 모두 문을 닫아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흘렀다.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의 작은 광장 바닥에 한 사내가 슬픈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서 얼굴은 물론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카를로바의 이발사 홀리츠, 장사가 안되는 모양이지?”
카렐 다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내의 등 뒤에서 싸늘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홀리츠라고 불린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할멈이 여기는 웬일이야?”
홀리츠 뒤에 선 사람은 틴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청소를 하는 유령 파블리나였다. 지니, 리즈, 쿨에게 유령 여행사가 있는 유니콘의 집을 알려 준 유령이었다.
“온몸에 힘이 축 빠진 걸 보니 오늘도 손님이라고는 그림자도 못 본 모양이군?”
홀리츠는 다시 고개를 카렐 다리로 돌렸다. 파블리나와 상대하기 싫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홀리츠는 파블리나에게 말하는 것인지, 혼잣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오겠지. 기다리다 보면….”
파블리나는 비웃듯이 말을 툭 내뱉었다.
“500년 동안 하나도 안 온 손님이 앞으로 언제 올까? 한밤중에 유령에게 머리를 깎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이제 헛꿈에서 깨어날 때도 되지 않았어?”
홀리츠는 화가 난 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파블리나를 노려보았다.
“한마디만 더 하면 수염을 깎는 면도칼로 당신 심장을 도려내 버릴 거야.”
파블리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기 전에 당신이 먼저 갈기갈기 찢기면 어떻게 하지?”
홀리츠는 더 화가 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아주 차갑게 반짝이는 면도칼이 들렸다. 그는 파블리나의 멱살을 붙잡고 면도칼을 턱에 가져다 댔다.
“정말 중간세계 너머로 가고 싶은 모양이군.”
파블리나는 계속 키득거리며 두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어…어…. 이게 뭐야? 왜 이러지?”
갑자기 홀리츠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버둥거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파블리나는 손을 더 높이 들어올렸다. 홀리츠는 카렐 다리 앞의 구시가지 탑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이…이건 마…마법이야? 할멈이 어떻게 마법을…?”
홀리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블리나는 두 손을 내렸다. 홀리츠는 순식간에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어떻게 마법을 하는지 알고 싶겠지. 무척 궁금할 거야. 지금 나를 따라가면 그걸 알 수 있어. 누가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줬는지.”
“마법을 가르쳐 줬다고? 유령에게 누가 마법을 가르쳐 준단 말이지? 유령은 마법을 써서는 안 되는 게 원칙인데?”
파블리나는 다시 낄낄거렸다.
“중간세계의 지배자 스비아토 님에게서 비밀스러운 임무를 부여받고 인간 세상에 나오신 마법사 켈리 님께서 너를 보고 싶어 하신다. 그곳에 가면 내가 어떻게 마법을 하는지 알게 될 거야.”
홀리츠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켈리라고? 그자는 엉터리 연금술사잖아? 왜 그자를 마법사라고 부르는 거지? 게다가 그자는 벌을 받아 인간세상에 나올 수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자를 만난다는 거야? 할멈, 또 무슨 거짓말을 하는 거지?”
파블리나는 홀리츠의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에게서 등을 돌려 강변로를 따라 걸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걷는다기보다는 바람처럼 흘러갔다.
“가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홀리츠는 파블리나를 따라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의 몸은 마음과는 달리 파블리나의 뒤를 따라갔다. 실제로는 따라간 게 아니라,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몸이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끌려간 것이었다. 이것도 마법인지 의심하는 홀리츠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크르르!
카렐 광장을 뒤덮은 나무 사이에서 끔찍한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개 울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끔찍하고 소리가 굵었다. 카렐 광장은 프라하 시내였기 때문에 괴음을 지르는 동물이 산이나 들판에 사는 늑대는 아닌 게 분명했다.
잠시 후 나무 사이에서 파르스르한 안광이 나타났다. 끔찍한 울부짖음은 그 안광 쪽에서 흘러나왔다. 안광은 점점 커지더니 희미한 형상으로 변했다. 늑대 같기도 하고 개 같기도 했지만 덩치는 훨씬 컸고 이빨도 더 굵고 날카로운 괴물이었다. 온몸은 비쩍 말랐고 곳곳에서 피가 흘렀다. 발톱은 굵고 뾰족한 못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야옹!
카렐 광장 한쪽 구석의 나무 벤치 아래에서 잔뜩 긴장하고 겁을 먹은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동그랗게 뜬 눈에서는 시퍼런 빛이 튀어나왔다. 수상한 괴물이 내뱉은 괴음에 놀란 길 고양이였다.
크앙!
괴물은 고양이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고양이는 대꾸도 못 하고 벤치에서 꼬리가 빠지게 달아나고 말았다.
크르르!
괴물은 팔라츠케호 다리 쪽을 노려보며 계속 소리를 냈다. 그곳에서 희미한 연기 같은 물체 두 개가 날아왔다. 틴 성모 교회의 할머니 유령 파블리나와 그녀에게 끌려온 카를로바의 이발사 홀리츠였다.
크르르!
괴물은 파블리나와 홀리츠를 향해 다시 나지막하게 괴음을 내질렀다. 파블리나는 손가락을 입에 댔다.
“엔마우스의 개야! 나란다. 잠든 사람들이 깰 수 있으니 이제 조용히 하렴. 쉿!”
크르르!
파블리나가 엔마우스의 개라고 부른 괴물은 진정하라는 그녀의 지시에도 잔혹한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파블리나는 괴물을 지나 벽이 분홍색으로 칠해진 건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십자가 모양 표식이 붙었다. 이곳이 병원이거나 약국이라는 걸 알리는 표식이었다. 그녀는 문이 굳게 잠긴 건물의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홀리츠도 하릴없이 그녀를 따라 벽을 지나야 했다. 부르크달라는 홀리츠와 3~4m 간격을 둔 채 뒤에서 따라갔다.
두 유령과 엔마우스의 개는 1층 로비 한쪽 구석에 있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짙은 어둠이 깔린 데다 계단 아래에는 불도 전혀 없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삐~걱!
파블리나는 지하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다른 엔마우스의 개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였다.
크르릉!
엔마우스의 개 뒤편 지하실 가장 안쪽에는 시뻘건 빛이 가득했다. 빛은 전등에서 새어 나오는 게 아니라 바닥에 쪼그려 앉은 한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파블리나는 사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중간세계에서 오신 마법사 켈리 님. 분부하신 대로 유령 한 명을 붙잡아 왔습니다.”
파블리나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자칫 말을 실수했다가는 곤욕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도 숨어 있었다.
지하실에서 시뻘건 빛을 발산한 사내는 지니, 리즈, 쿨과 함께 중간세계에서 탈출한 켈리였다. 그는 파블리나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듣고 서서히 바닥에서 일어나 몸을 뒤로 돌렸다. 중간세계에서 막 탈출했을 때보다는 몸이 훨씬 선명했고, 시뻘건 눈빛도 훨씬 강렬했다.
“카를로바의 이발사 홀리츠! 오랜만이군.”
비열한 미소를 건네는 켈리의 얼굴을 본 홀리츠는 기겁하고 말았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켈리를 잘 알았다.
“연금술사 켈리!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카를로바 거리의 자네 이발소에 머리를 손질하러 가끔 들렀던 기억이 새롭군. 그게 벌써 500년은 넘었어. 그러고 보면 세월이 정말 빨라. 그렇지 않나?”
홀리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켈리의 얼굴을 다시 유심히 살폈다. 정말 켈리인지, 아니면 잘못 본 것인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발소 단골손님이었던 연금술사 켈리가 분명했다.
“중간세계의 규칙을 어겨 100년간 인간세상 출입 금지 벌을 받았다고 하던데 여기는 어떻게 나왔지?”
켈리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진공청소기에 먼지가 빨려드는 것처럼 홀리츠는 순식간에 그의 코앞에까지 끌려갔다.
“스비아토 님의 선견지명 덕분이지. 그분께서 나를 살려주시고 밖에 나올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셨지.”
“스…스비아토?”
홀리츠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몸을 버둥거리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지하실 곳곳을 살펴보았다. 이곳저곳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유령 여럿이 보였다. 일부 유령의 몸에서는 연한 파란색 연기가 희미하게 솟아올랐다.
켈리는 오른손을 홀리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분께서 나를 위대한 사업의 선봉장으로 세워 주셨거든. 그리고 유령에게는 금지된 마법도 가르쳐 주셨지. 정말 대단하고 감사한 분이야.”
“위…위대한 사업이라니? 무…무슨 말이지?”
켈리는 껄껄 웃었다.
“조만간 중간세계는 물론 인간세상까지 새롭게 바뀔 거야. 그분께서 새로운 두 세상의 지배자로 거듭나시게 될 거야.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위대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지.”
켈리는 말을 마치면서 오른손을 홀리츠의 가슴으로 집어넣었다.
“윽!”
홀리츠는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질렀다. 켈리는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그의 심장을 꽉 잡았다.
“크윽!”
홀리츠의 비명은 더욱 거칠어졌고 그의 인상은 찌그러진 깡통처럼 일그러졌다.
“오랜 지인인 자네에게는 미안하군. 하지만 내가 살아나고 힘을 얻어 위대한 사업을 준비하려면 어쩔 수 없어. 자네의 정령이 담긴 심장을 내가 좀 가져가야겠어. 나중에 일이 잘되면 스비아토 님께 자네를 부활시켜 달라고 부탁해 보도록 하지.”
켈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홀리츠의 심장을 뜯어냈다. 큰 구멍이 생긴 홀리츠의 가슴에서 시퍼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켈리는 천천히 홀리츠의 심장을 뜯어먹었다. 인간의 심장이었다면 시뻘건 선혈이 낭자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겠지만 유령에게는 피라는 게 없고 시퍼런 연기뿐이어서 그나마 덜 참혹해 보였다.
홀리츠를 끌고 온 파블리나는 켈리가 심장을 뜯어먹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살아 있을 때 거짓말을 잘하고 남을 속이기를 일삼은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남을 해칠 만큼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승에 간 영혼은 인간세상의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지만, 중간세계의 유령은 살아 있을 때의 마음, 심성, 기억을 그대로 가져가는 게 법칙이었다. 원래 겁이 많았던 그녀는 덜덜 떨었다.
“다…다른 유령을 더…더 잡아 올까요?”
홀리츠의 심장을 섭취한 켈리의 몸은 더 선명해졌고 눈은 더 뻘게졌다.
“물론이지. 하루에 적어도 다섯 명의 심장을 먹어야 해. 그래야 스비아토 님에게서 배운 마법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프라하의 유령을 데려오도록 해. 그리고 내일은 그것 말고 한 가지 할 일이 더 있어.”
“다른 일이라고요?”
켈리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파블리나를 끌어당긴 뒤 손가락을 그녀의 머리에 집어넣었다. 파블리나의 머리에 낯선 집이 나타나더니 집 안에서 생각에 잠긴 소녀가 보였다.
“저 아이는!”
켈리는 파블리나의 머리에서 손가락을 빼내며 킬킬 웃었다.
“세상의 인연이라는 게 참 우습지. 할멈이 며칠 전에 구시가지 광장에서 만난 아이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파블리나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건가요?”
켈리는 지하실 구석으로 걸어가 바닥에 앉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대답했다.
“내일 저녁에 아이를 내게 데려오도록 해. 이것은 나의 지시가 아니라 스비아토 님의 지시야. 실수할 경우 큰 곤욕을 치를 테니 일을 제대로 하도록 해.”
“저 아이를 데려오라고요? 저런 꼬마를 어디에 쓰시려고?”
켈리는 오른손을 뒤로 살짝 흔들었다. 파블리나는 켈리에게서 갑자기 불어온 강풍에 지하실 반대쪽 벽으로 날려갔다.
쿵!
파블리나는 큰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틴 성모 마리아 교회의 청소부 파블리나! 내 말에 절대 대꾸를 하지 마.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이번은 용서하지만 다시 말대꾸를 할 경우에는 너의 심장도 뜯겨나갈 줄 알아!”
파블리나는 엉금엉금 기듯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지하실 문 쪽으로 슬그머니 달아났다. 이곳에 더 오래 머물렀다가는 본전은커녕 유령 목숨도 못 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뒤에서 그르렁거리는 엔마우스의 개들의 비웃음을 들으며 그대로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