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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Sep 15. 2022

바셋

호우스카 성 예배당 앞의 복도에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깎아지른 것처럼 가파른 절벽이 나타난다. 얼마나 높은지 끝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절벽 양쪽은 하늘을 완전히 가릴 만큼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이다. 나무둥치는 아무리 좁게 잡아도 어른 두 명의 팔 길이를 넘는다. 크기와 굵기로 짐작해볼 때 최소한 수백 년 된 나무들이다.

‘이 성의 역사도 나무만큼 오래됐겠지?’

지니는 두 팔로 창턱을 붙잡고 서 있었다. 그는 창 너머로 멀리 보이는 마을로 시선을 바꾸었다. 1주일 전만 해도 철없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던 그는 지난 며칠간 벌어진 엄청난 일들을 하나씩 돌이켜보는 중이었다. 

며칠 사이에 믿기 힘든 사건이 연거푸 일어났다. 유령이 산다는 중간세계에 가서 곤욕을 치렀고, 호우스카 성에서 뜻하지 않게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예배당의 지하에서는 세상을 떠난 엄마를 만났고, 중간세계에서 탈출한 마법사 켈리와 목숨을 건 일대혈전을 벌였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야.’

지니는 손목을 들어 크리스탈 팔찌를 힐끔 쳐다보았다. 모든 일은 꿈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는 창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우~~!”

늑대 울음 같기도 하고, 중간세계에서 만난 괴물의 괴성 같기도 한 낯선 소리가 절벽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가만히 들어보니 성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환청인가? 아니면 진짜 괴성인가?’

지니는 고개를 약간 더 내밀어 절벽 아래쪽을 유심히 살폈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양쪽 숲도 살폈다. 그곳에서도 보이는 것은 나무뿐이었다. 괴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지니는 몸을 돌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고양이 수백 마리가 악마가 싸우는 그림은 물론 희한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두운 밤길을 행진하는 그림도 있었다. 병사가 유령에게 노란색 화살을 쏘는 그림, 손전등 비슷한 도구로 괴물을 공격하는 그림도 보였다. 예배당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놓였고 그 아래에는 독특한 문양의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지니는 꿈에서 고양이가 했던 것처럼 양탄자를 발로 툭툭 찼다. 테이블과 양탄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 되는 것이지?’

지니는 테이블을 옆으로 치우고 양탄자를 둘둘 말았다. 꿈에 나타났던 나선형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예배당의 다른 바닥처럼 잘 다듬은 돌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없잖아? 어떻게 된 거지?’

지니는 양탄자 아래의 돌을 발로 굴렀다. 손으로 들려고 힘을 쓰기도 했다. 돌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옹!”

지니의 등 뒤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예배당 입구에 고양이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에는 없었는데….’

“야옹!”

고양이는 꼬리를 높이 세우고 지니 앞으로 오더니 벌러덩 드러누웠다. 지니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고양이의 머리와 등, 배를 부드럽게 간질여주었다.

“야옹!”

고양이는 지니의 손가락을 살살 핥았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뭐라고?”

지니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는 예배당 밖으로 뛰어나가 복도를 살폈다. 거기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누가 말한 것이지?’

지니는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곳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그와 고양이뿐이었다.

‘설마?’

지니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고양이 앞에 다시 앉아 고양이의 두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설마가 아니야. 내가 말한 게 맞아.’

지니는 기겁해서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나며 크게 눈을 떴다.

“정말 네가 말한 거라고?”

고양이는 지니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야옹!”

지니는 고양이를 자세히 살폈다. 온몸에 다른 색이라고는 하나 없이 온통 노란색 털뿐이었다. 

“지난번 꿈에 나를 이곳 지하로 데려간 애와 비슷하게 생겼구나.”

“야옹!”

고양이는 지니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쓰다듬어 달라는 것처럼 머리를 들이밀었다.

지니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고양이 머리를 만져주었다.

“정말 네가 말을 하는 거니?”

‘너에게만 말하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아.’

“지난번에 왔을 때에는 없었잖아?”

고양이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원래 이곳에서 살아. 그날은 성 주변의 고양이들을 살피러 가느라 낮에 없었을 뿐이야.’

“할머니가 너를 키우는 거니?”

“야옹!”

고양이는 웃음을 터뜨리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누가 나를 키우는 건 아니야. 내가 스스로 살아가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나는 이 성에서 오래 살았어. 야로미르가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는 것까지 다 지켜봤어. 아네타가 결혼해서 처음 왔을 때 성의 분위기에 겁을 먹고 덜덜 떨던 모습도 생생해.’

지니는 고양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니? 고양이는 아무리 길어도 20년 이상 살지 못해. 그런데 네가 어떻게 야로미르 할아버지가 태어나는 모습을 봤다는 거야?”

고양이는 앞발을 들어 지니의 손등을 툭 쳤다.

‘그건 평범한 고양이 이야기이고.’

“그럼 너는 다르다는 말이야?”

고양이는 갑자기 훌쩍 뛰더니 예배당의 창틀로 올라갔다.

‘네가 유령위원장이 될 때까지 하나씩 알게 될 거야. 다만 지금 내 나이는 삼백 살을 넘었다는 것만 알면 돼.’

“삼백 살?”

지니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고양이가 삼백 살이라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여기에서 살면서 여러 유령위원장을 도왔지. 지난 삼백 년은 물론 그 이전부터 해온 일이지.’

지니는 ‘그 이전부터’라는 표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야로미르와 루드밀라가 죽은 뒤부터 이상한 일이 많아졌어. 고양이가 유령에게 학살당하는 일도 잦아졌지.’

지니는 안드레이가 매주 토요일에 고양이를 불태운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다. 경찰서에 신고가 너무 많이 접수돼 경찰관들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안드레이 할아버지가 고양이를 불태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고양이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안드레이가 고양이를 불태운 건 아니야. 장례를 치러준 것이지. 그 사람은 200년 전에도 그런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어. 그때에도 유령위원장 자리가 잠시 비어서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였거든.’

고양이는 계속 이상한 소리를 했다. 

“안드레이 할아버지 나이가 일흔 살 정도인데 200년 전이라는 건 무슨 말이니? 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계속 하는구나.”

야옹!

고양이는 창틀에서 폴짝 뛰어내려 지니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안드레이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남의 인생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지니는 고양이와 눈을 맞췄다.

“네가 하는 말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이해를 못 하겠어.”

‘앞으로 천천히 알게 될 거야. 중요한 건 네가 어서 유령위원장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거야. 오늘 여기 온 것도 팔찌 사용법을 배우려는 거잖아?’

“그래, 맞아. 나는 팔찌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

고양이는 지니의 팔찌를 핥았다.

‘오늘부터 내가 도와줄 거야.’

지니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도와준다고? 어떻게?”

‘아까도 말했지만 유령위원장을 돕는 게 내 일이야.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일 뿐 아니라 고양이도 살리는 일이지.’

고양이는 꼬리를 높이 들고 예배당 입구로 걸어갔다.

‘나중에 자정이 되면 다시 여기로 오도록 해. 중간세계로 가는 계단이 열리는 건 그때뿐이니까.’

“네 이름은 뭐니? 어떻게 부르면 돼?”

야옹!

고양이는 입구에서 머리를 뒤로 잠시 돌렸다.

‘바스텟. 원래 이름은 바스텟이야. 부르기 쉽게 줄여서 바셋이라고 하면 돼.’

“바스텟. 바셋.”

지니가 이름을 외는 동안 고양이는 예배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앗! 잠깐만.”

지니는 소리를 지르며 뒤를 따라갔다. 불과 1~2초 만에 고양이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2층 복도에서 아래를 쳐다봐도, 창밖으로 절벽을 내려다봐도 고양이의 흔적은 없었다.

‘어디로 간 것이지?’


산에 올라가면 대개 높은 산봉우리와 숲에 가려 해가 일찍 저물게 마련이다. 호우스카 성은 그렇지 않았다. 숲과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산 정상 부근에 자리를 잡은 덕분에 이곳에서는 늦게까지 일몰을 볼 수 있었다. 

지니는 식당의 테이블에 앉아 창밖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끔찍한 피가 세상으로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두 눈을 비비고 창밖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노을에서 엄마의 얼굴이 나타났다. 한국에서 살 때 엄마랑 노을을 보러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루드밀라도 그 자리에서 창밖으로 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단다.”

굴라시와 스크램블드에그를 테이블의 빵 옆에 놓은 아네타는 지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엄마는 한국에서도 노을을 정말 좋아했어요.”

“루드밀라는 어릴 때부터 시적인 아이였단다. 특히 노을을 좋아했지. 노을을 보면서 아름다운 시 구절을 만들어내곤 했어. 공책에 적어놓기도 했고 내게 몇 가지를 들려주기도 했어. 노을은 삶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의 출발이다.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노을은 나의 뜨거운 열정이다.”

“엄마가 시도 썼어요?”

“루드밀라는 아름다운 건 뭐든 좋아했어. 꽃, 노을, 강, 산은 물론이고 시도 즐겨 읽었어. 그런 아이가 매일 유령을 만나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니?”

지니는 숟가락으로 굴라시를 떠서 입에 넣었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을 감싸고돌면서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아까 예배당에서 고양이를 만났어요.”

아네타는 자리에 앉아 굴라시를 뜨며 지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셋을 본 모양이구나.”

“신기한 고양이였어요. 왜 평소에는 안 보이는 거죠?”

아네타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눈을 위로 올렸다.

“50년 전에 야로미로와 결혼해서 이곳에 오니까 바셋이 있었어. 정말 희한한 고양이였어. 늘 야로미르만 따라다녔지. 나중에는 루드밀라 곁을 지켰고. 내 주변에는 다가오지도 않았어. 지금도 그래. 나는 한 번도 바셋을 만져보지 못했어. 누가 밥을 따로 챙겨주는 것도 아닌데 무엇을 먹는지 몰라. 분명히 성 안에서 살기는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어. 야로미르 말로는 고양이 나이가 삼백 살이 넘었다고 하더구나. 믿을 수는 없었지만 야로미르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 말은 사실일 거야.”

지니는 바셋이 한 말이 기억났다.

“고양이가 저에게도 자기 나이는 삼백 살을 넘었다고 말했어요.”

아네타는 눈을 둥글게 떴다.

“바셋이 네게 말을 했다고?”

“네.”

“신기한 일이로구나. 야로미르와 루드밀라도 그랬어. 바셋이 말을 한다고.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바셋의 말을 들은 적이 없단다.”

지니는 이번에는 스크램블드에그를 입에 넣었다. 

“고양이가 자정 이후에 예배당에 다시 오라고 했어요. 유령위원장으로서 배워야할 게 많다면서요.”

아네타는 이번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령위원장 일을 물려받으려면 예배당에 가지 않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나는 걱정이구나.”

지니는 할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걱정이라뇨?”

“예배당이 어떤 곳인지 너는 몰라서 그래.”

아네타는 굴라시를 뜨던 숟가락을 식탁에 놓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800년 전까지 프르셰미슬 가문은 프라하 시내에서 살았어. 프라하는 평화로웠지. 유령이 질서를 잘 지켜 인간 세상을 괴롭히지 않았어. 그때 블라트체에서 괴물 유령이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어. 하체는 인간의 몸이고 상체는 동물인 괴물이 밤만 되면 마을에 나타나 사람을 잡아갔다는 거야. 

유령위원장은 당장 조사에 나섰어. 산을 샅샅이 뒤진 끝에 마을을 내려다보는 산봉우리의 큰 바위 아래에 구멍이 있는 걸 발견했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멍이었대. 그는 며칠 동안 근처에 숨어 구멍을 살폈어. 알고 보니 구멍은 중간세계에 사는 괴물 유령이 몰래 인간세상으로 빠져나오는 비밀통로였던 거야. 유령위원장은 비밀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구멍 위에 십자가를 모신 예배당을 건설했어. 예배당 주변에는 성을 지었고. 호우스카 성이 바로 그곳이란다.”

지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 예배당 아래 중간세계로 들어간 걸 떠올렸다.

“구멍에는 왜 계단을 만든 거예요? 아예 막아버리지.”

“유령위원장은 가끔 중간세계에 가야 한단다. 인간세상에서 유령의 난동이 벌어지면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거기를 둘러봐야 해. 원래 프라하에는 중간세계로 들어가는 길이 두 곳 있었어. 하나는 프라하 성 안이었고 하나는 성 밖이었지. 두 곳에는 지금 성 비투스 대성당과 로레타 성당이 서 있단다. 두 성당 모두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야. 그곳에서 중간세계로 오갔다간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십상이지. 고민하던 유령위원장은 거처를 호우스카 성으로 옮긴 거야.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중간세계에 갈 수 있도록.”

“유령이 계단을 통해 인간세상으로 빠져나오지는 않나요?”

아네타는 고개를 저었다.

“구멍 위에 성모 마리아를 모신 예배당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는 못해. 예배당에서 사람이 아래로 내려갈 수는 있어도 유령이 밖으로 도망치는 일은 있을 수 없지.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세상에는 난리가 나겠지?”

“바셋은 왜 저에게 자정을 지나서 그곳으로 오라고 한 걸까요?”

아네타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나는 가본 적이 없어서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몰라. 야로미르에게서 들은 것뿐이지. 그 사람 말로는 예배당 지하로 내려가 중간세계에서 유령을 만난다고 했어. 루드밀라에게 훈련을 시킬 때도 그곳으로 데리고 갔어. 둘이 거기에서 뭘 했는지는 몰라. 둘 다 거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거든. 다만 루드밀라가 그곳에 갈 때마다 늘 넋이 빠진 얼굴로 돌아온 걸 보면 험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 바셋이 너에게 오라고 한 것도 아마 루드밀라와 비슷한 걸 경험시키려는 거겠지. 그래서 나는 걱정이란다. 과거에는 야로미르가 있어 큰 힘이 됐지만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고양이 한 마리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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