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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양 Dec 19. 2023

감정 쓰레기통 그만할래요.

전혀 괜찮지가 않습니다.


엄마와 나의 통화를 들은 남편이 실소를 터트렸다. 엄마한테 왜 그렇게 퉁명스럽게 답하느냐며 나를 다그쳤다. 엄마와의 통화는 늘 그런 식이다. 전화를 걸어오는 쪽이 나의 말은 들을 겨를도 없이 본인이 해야 할 말을 마구마구 쏟아낸다. "나는 뭘 했고 뭘 할 거며 누구가 뭐라고 하더라"라며 나한테 전화를 걸어 본인의 안부만을 남겨주는 전화. 나는 그전화를 15년 이상 듣고 있다. 


어렸을 때 내 기억은 엄마는 늘 전화통을 붙잡고 살았다. 모뎀을 사용하던 그 시절 "또 전화중이야?" "인터넷이 안되잖아"라며 늘 엄마와 싸웠다. 매일 도대체 누구랑 통화를 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엄마의 전화 패턴은 비슷하다. 전화부에 있는 가족들에게 돌아가며 전화를 한다. 무슨 이슈가 있다면 이 전화로 우리 가족은 모두가 소식을 전해 듣는다. "너 그랬다며?"라며 연락도 자주 안 하는 사람이 내 소식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아니 이 집은 무슨 비밀이 이렇게 없어"라며 짜증을 냈다.


엄마의 전화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사시게 되면서 매일 전화를 하셨다. 물론, 혼자되신 엄마의 전화쯤이야 들어줄 수 있지만 매번 엄마의 외로움을 듣고 있다 보면 양방향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하소연을 들어주는 감정쓰레기통이 되는 느낌이었다. 결국 "엄마.. 다들 그러고 살아. 엄마만 그러고 사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노인 우울증이 심각하기 때문에 노인과 대화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었다. 나는 T성향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끊임없는 하소연에 지쳤다. 부잣집 첫째 딸 그것도 7년 만에 얻은 귀한 딸이었던 엄마는 이모들과 달리 의존적이고 아기 같은 면이 있었다. 누구보다 생활력이 강한 엄마였지만 집에서만큼은 귀한 부잣집 첫째 딸이었기에 공주대접을 받는 분이었다. 강인한 엄마의 모습과 달리 나약하고 의존적인 엄마의 모습이 우리 두 딸은 지쳐갔다. 3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사는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은 가족모임을 했왔고,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엄마와 데이트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엄마의 전화소리는 노이로제에 걸리게 만들었다.


30대 당연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늘 안절부절못하는 나의 상황은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여기면서 본인의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였던 엄마가 나는 몹시 미웠다. 나도 엄마한테 징징거려보고 싶었지만 항상 엄마는 본인의 말만을 들어주길 바랐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시달리다가 결국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왔고, 내가 받지 않으면 남편에게까지 전화하는 엄마를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엄마의 딸이기도 하지만 나는 내 가정을 이뤄고, 이제는 나도 내 삶에 집중하며 살면 안 되겠냐며 울며 나의 입장을 얘기했다.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님이 빨리 늙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프다. 남들보다 빠르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나는 의연할 수가 없는 것을 의연하게 바라봐야 했다. 감정적인 모습의 나와 이성적인 어른들의 모습은 대립해야 했고 여전히 나는 상처받은 꼬마아이다. 아이가 없이 살다 보니 부모님 케어도 온전히 나의 몫이었고, 시간적 여유가 있고 어린 내가 하는 일이 당연한 듯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결혼 생활 내내 내 남편도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삶을 살고 싶은 40대에 접어들었다. 언제까지 엄마 때문에 주저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서울 사람인 남편은 이 지방에 취직해 나와 결혼을 하고 본가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장인장모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연하게 나는 부모님 옆을 지켜야 하는 착한 딸이고 싶었고, 남편은 자연스럽게 그 옆을 지켜왔다. 하지만 이런 일을 10년 이상 해오다 보니 결국 나가떨어진 것은 나였다. 내가 당면한 문제는 외면한 채 착한 딸 노릇만 열심히 해왔던 나는 결국 병까지 얻었다. 


이제 와서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선택은 내가 했고, 내 선택이 조금 특별했을 뿐이다. 특별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그냥 착한 딸이 되어 자신들의 생이 마감할 때까지 옆에 있기만을 바라왔던 부모님이었기에 나는 착실히 그런 딸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나는 갑자기 머리를 꽝 맞은 듯이 '이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는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좀 더 어렸을 때 이런 것을 알았더라면 나도 내 꿈을 펼칠 수 있었을까? 좀 더 멀리 나가봤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어차피 지나간 거 이제는 지금 내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니까'라며 나를 위로한다.


투쟁 끝에 요즘은 예전과 달리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엄마의 전화가 온다. 여전히 "오늘은 뭘 했고, 오늘은 어디가 아프고, 누가 어쩠고"등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끊는 엄마지만, 조금이나마 달라지고 씩씩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엄마를 보면 참 다행이다. 친구도 없고 자식이 없는 나의 노후가 살짝 걱정되지만 요즘은 정책이 좋아져서 괜찮다는 엄마의 말을 믿어보며..

엄마와의 거리 두기를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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