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초 Mar 21. 2021

지극히 사적인 유산

날 것에 대한 기록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포도를 가꾸며 살아가는 것, 그러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사랑하고 헤어지고 병들고 아파하고... 그런 시간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빛과 희망, 꿈, 무지개... 우리가 아름답다고 믿어 온 모든 의미들조차 대기의 한 

질료에 불과한 것인가. 오랫동안 나는 그 바닷가를 서성거렸다.


곽재구, 『곽재구의 포구 기행』 中    


이 말이 순간적으로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슴속에 파고드는 이 언어들의 집합체가 나의 독백인 양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로 스며들어 왔다. 

‘오랫동안 나는 그 바닷가를 서성거렸다.’ 

고뇌하는 작가의 깊은 발걸음의 느낌이 잔잔히 오버랩되는 순간에 얼마간 나의 의식 속에 자리하던 것들이 쐐기를 박는 듯 강하게 다가왔다. 

쪽빛과 마주하다. 강원도 고성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들의 연속이 쌓이고 쌓여서 의미가 되고 일생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루하루의 시간을 지내며 견뎌온 숱한 날들은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냥 어쩔 수 없이 살아지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아름답다고 믿어 온 모든 순간들과 모든 의미들은, 작가 스스로에게는 분명 의문스러운 질문이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이 의문스러움에 대해, 다시금 내가 지나온 무의미, 혹은 대단한 의미의 시간들을 기록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순간의 감정들을 한 치의 의심 없이 그저 활자로 남기는 일이라는 그것은, 어쩌면 내가 가진 의문이라기보다는 무의미하게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는 그 허깨비 같은 시간들을 붙잡아다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런 사명감에서 출발하게 된 시간의 기록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되어주길 바란다.

한낱 대기의 질료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까지도 붙잡아다가, 나와 평생 붙어있자고 꼬드기고 싶어 진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