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바디>, 2021.
어느샌가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차가움을 넘어 칼처럼 아픈 바람이 피부를 할퀴는 기분이 든다. 2024년을 보내고 2025년을 맞이하며, 당신은 조금 더 어지럽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살이를 경험하고 있는가, 혹은 따뜻한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며 차가운 눈 위로 햇빛을 보듬고 있는가. 칼바람처럼 모진 현실을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대강 '뻔한 액션 영화인줄 알았더니, 코미디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영화야?' 싶은 영화다. 모처럼 속 시원한 쾌감과 인생에 자신감을 불어넣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조금은 더 당신의 일상을 영화처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줄 테니.
영화 <노바디>는, 가장 일상적인 순간들은 영화처럼 그려내고 가장 영화적인 순간들은 일상처럼 그려낸다. 그 전복으로 인해 관객들은 이 영화가 일반적인 액션 영화와 무언가 다름을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허치가 영화 초반 버스 안에서 불건전한 무리들을 처치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답지 않게 그는 생각보다 많이 얻어맞고, 칼에 찔리기도 한다. 비실해 보이는 허치가 그들을 처치하는 과정에서 어떤 마법이나 전설적인 멋진 액션을 발휘하는 장면은 없다. 다만 허치는 그들을 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조금은 녹슬었지만 여전히 건재한 몸놀림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모두 처치하며 또 한 편의 전설을 쓰는 셈이지만, 무엇보다 그 모든 싸움 하나하나가 그에게도 몹시 ‘애쓰는’ 사투임을 영화가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만하다. 허치는 남들이 보기에는 전설적인 존재이나 사실 그도 힘들게 문제 하나하나를 해결해 가는 사람일 뿐이다. 가장 빛나고 극적으로 그려져야 할 액션의 순간들은 이처럼 다소 애잔하고도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관객들은 매료될 준비가 되었다가도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 없다.
<노바디>는 가장 중요하고 행복하고 집중해야 할 순간은 ‘일상’이지 ‘액션’이 아님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충실하게 표현하는 영화이다. 자신의 집에서 수 명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는데도 영화 속 아무도 그에 대해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집은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허치가 거의 다 죽어가는 침입자들을 소파에 앉혀놓고 LP를 틀고 집을 태우는 장면에서는, 아주 태평하게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음악이 흘러나온다. 턴테이블 바늘을 타고 우아하게 불길이 시작된다. 이에 더해 총싸움이 난무한,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해야 할 액션 장면들에서는 영화가 애초에 주인공이 총을 맞게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액션은 힘을 주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다.
그러한 액션의 순간들은 곧 ‘커다란 라자냐’로 가득 찬 화면에 뒤덮여 버린다. 영화는 일상의 즐거움, 허치가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에 더 힘을 실어 표현한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범하고 가볍게 시작되었다 끝나는 액션보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세계는 가족과 일상이다. 즉, 이 영화의 세계관 내에서 액션이란 아무리 대단하고 위험하더라도 그저 일상을 좀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수단, 일상에 가끔씩 귀찮게 끼어들 정도의 중요성밖에 띌 수 없는 수단이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차를 몰고 차고에서 나가는 장면, 마지막에 아내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니는 장면이 더 과장되어, 극적으로, 현실보다 따뜻하거나 급박하게 그려진다. 한밤중 다치고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라고 진심을 다해 털어놓는 허치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힐 때 관객들은 그의 섬세한 표정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 불빛이 비치는 차고지 문 앞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피신하는 아내가 허치에게 "살아 돌아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라고 엄숙하게 이야기하는 장면 역시 필요 이상으로 ‘영화처럼’ 극적으로 연출되어 또 한 번 새로운 웃음을 자아낸다.
허치에게 “내 집에 쳐들어왔다”는 침입은 수백억 연금과 수십 점의 명화와 희대의 소시오패스의 목숨 정도는 간단히 파괴될 만큼 분노할 만한 일이다. 영화는 가족이 그 정도의 가치를 충분히 갖고도 남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우스울 만큼 손쉽게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마피아 조직을 완전히 박살 내는 허치의 모습과, 아내와 가족과의 관계를 원하는 대로 회복하지 못해 절절매는 허치의 모습이 대조되며, 관객들은 기존 액션 영화에서 수없이 봐왔던, '액션영화에서 힘을 주어 표현해야 할 장면들'에 대한 공식이 뒤바뀌는 경험을 한다. 이는 <노바디>가 “액션 영화”임에도 이 영화에서 “일상"이 “액션”에 비해 얼마나 더 큰 중요성을 띄는지 한시도 잊지 않고 있는 작품이기에 가능한 경험이다.
<노바디>는 ‘악당’이 아닌 ‘악행’을 처단하는 영화이다. 허치가 과거 일화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300만 달러라는 거금과 연루된 악행을 저지른 인물을 처치하려는 찰나, 허치는 회개하겠다는 말에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낸다. 이후 그가 어떻게 살고 있나 확인해 보았더니 그는 정말로 깨끗하게 손을 털고서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허치는 이에 대해 정말 부러웠다고 말한다. 허치는 악행을 저지르던 인간이 변하는 모습과 가능성을 보았다.
한편 주인공 허치 역시 ‘영웅’이 아닌 ‘영웅적인 일’을 벌이는 ‘인간’ 일뿐이다. 허치는 겉모습에서부터 힘없어 보이는 마른 중년의 남성이며, 그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힘겹게 액션 장면을 만들어가는가는 위에서 이미 충분히 언급했다. 그러나 우연히 버스에서 큰 싸움을 벌인 후 허치는 “내 안에서 무언가 깨어났다”라고 말한다. 허치는 다른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며 도망갈 정도로 엄청난 과거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무자비하게 침입자들을 해치우며, 결과적으로는 악행을 저지르는 무리를 처단한 셈이지만, 결국 그 역시 수많은 사람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 때로는 허치가 짓는 표정이 악당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허치는 자신의 집에 들어온 강도를 죽이지 않는 자비를 베풀었지만, 결국은 자괴감과 가족들의 실망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강도의 집에 들어가 그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확실히 결코 ‘선행’에 대한 교훈을 전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근원적인 인간의 본성에는 폭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작품일 수도 있다. 버스에서 죽도록 사람들을 때린 허치의 마음속에서는 무엇이 깨어난 것일까? 소녀를 구한다는 핑계는 명목상의 이유에 해당하지는 않는가? 따지고 보면 아직 큰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때려야 했나? 허치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당한 부당한 침입에 대한, 그리고 세상의 부당한 힘의 논리에 대한 분노가 깨어났나? 그 감정을 정의감이라고 할 수 있나? 혹은, 그 핑계에 가려진, 사람을 때리고 쓰러뜨리고 싸우는 일에 대한 감각 자체가 깨어났다고도 볼 수 있을까? 생사가 오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도파민은 허치도, 허치의 아버지도, 관객들도 부정할 수 없는 감각이 아닌가? 허치의 마음속에서 깨어난 '무언가'는 선인지 악인지 모호하게 느껴지고, 결국은 둘 중 하나로 정의 내리기 힘든, 둘 다의 속성을 갖고 있는 그저 인간의 ‘무엇’이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결론적으로 영화가 생각하는 ‘인간’이란 ‘노바디’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선과 악 중 어느 편이라고도 부를 수 없지만 어느 편도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힘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무엇이라고 명명할 수 없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인 것이다.
<노바디>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는 노인과 마른 중년이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원대한 꿈의 상상력의 장을 열어 보인다. '왕년에' 활약 좀 하고 다녔을 것만 같은 허치의 아버지는 지금은 텔레비전을 시끄럽게 틀어놓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는 힘없는 노인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하여 자신을 납치하러 온 이들을 여전히 총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마지막에 아버지와 해리가 함께 행복하게 트럭을 타고 가는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간 후, 관객들은 그들이 그저 평범한 흑인과 별 볼일 없는 노인이 아닌, 일당백으로 신나게 싸우고 총을 쏠 수 있는 대단한 경험과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힘없어 보이는 허치가 사실 얼마나 전설적인 존재였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단숨에 처치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던가. 목소리로만 등장하던 해리와 매일 요양원 방 안에 앉아만 있던 허치의 아버지는 얼마나 든든하고 실력 있는 지원군이던가. 이들이 발휘하는 힘의 선악을 논하기 이전에, 그 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체만으로도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존중'을 표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총질’로 표현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사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며 경험하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대단한 인생의 페이지들을 뜻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기에 요양원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런 상황이 그리웠다는 아버지의 무덤덤한 말은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음만은 20대라는데, 이 영화는 아직 그 마음을 모르는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에 대한 열정의 불씨가 무엇인지에 대해 유쾌하게 전하고 있다. 이 영화는 각자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든 우리에게 보내는 박수와 존중의 의미이자, 우리를 바라보는 타자, 결코 우리의 모든 인생을 알 수 없는 타자에게 바라는 조금 더 열린 마음의 손짓이다. 영화는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들을 향해,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가능성의 존재를 인지할 것, 누구든 보이지 않는 인생의 풍파를 견디며 삶의 근육을 다져온 존재임을 기억할 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살다 보면 누구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비밀을 하나쯤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영화 <노바디>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위로하는, 발칙한 꿈의 풍선을 무럭무럭 키워내어 쾌감 있게 펑하고 터뜨려보는, 초라한 패턴의 인생을 조각조각 가위질하여 커다란 꿈 한 스푼 더하여 다시금 짠 하고 멋진 조각보로 재구성해보는, 쉽고 간단한 그러나 유쾌한 영화적 시도이다. 인생이 재미없어요? 인생이 구질구질해요? 아니, 여러분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집? 돈? 태워도 별 일 안 일어나요. 총? 마음대로 마음 가는 만큼 쏴봐요. 거대한 악의 세력? 그냥 쳐들어가서 다 죽이고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려요. 무엇이 별일이고 무엇이 별일이 아닌지는 여러분이 정하는 거니까요. 그러니 소중한 것들은 끝없이 소중하게 대하세요. 소중한 사람과 삶의 순간을 지켜내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어렵고도 중요하고 값질 테니. 중요한 게 뭐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세요. 여러분은 자유의 상태에서, 여러분이 이미 가진 힘을 써서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한 줄 평 : 현실을 영화처럼 영화를 현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