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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 산티아고

by 레띠쌰

쿠스코와 페루를 떠나 다음 여행지인 칠레로 떠나는 날. 쿠스코에서 지내는 내내 날씨가 좋았는데, 떠나려고 하니 날이 흐리고 비가 조금 왔다. 마지막까지 나의 편을 들어준 쿠스코의 날씨.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여기서 더 머물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쿠스코의 국제선은 정말 작다. 국제선이 어디냐고 공항 직원에게 물었더니 고속버스 대합실보다도 작은 듯한 대기실로 안내해주었다. 한참 기다리니 잠겨있던 유리문이 열리면서 산티아고로 가는 사람들은 이쪽에 줄을 서라고 했다. 대합실에서 출국수속장이 바로 연결되어있는 셈. 사람은 많은데 짐 검사하는 기계는 하나뿐이라서 시간도 오래걸렸지만 중간에 전기가 나가서 자꾸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다. 어수룩한 맛이 있는 쿠스코.

국제선은 게이트도 몇 개 없다. 그리고 간식을 판매하는 매대도 단 한 개 뿐이라서 이들이 부르는 것이 곧 값이다. 페루에 있는 동안 먹어보지 못한 잉카칩을 무려 8,000원을 주고 사먹어야 했고, 감자탕집 커피머신에서 나올 법한 라떼는 6,000원이 넘는다. 그 와중에 팁 문화가 없는 페루에서 '팁' 이라고 크게 한국어로 적어놓은 것을 보니 이 상술에 넘어간 한국인이 한 둘이 아닌가보다.

드디어 나라를 이동하는 날.

정들었던 페루를 떠나서 이제는 여행의 두번째 국가인 칠레로 떠난다. 칠레의 중심부에 있는 산티아고에서 시작해서 남극과 가까이에 있는 파타고니아의 푸에르토 나탈레스까지. 길쭉한 모양의 칠레를 가로질러 세상의 끝으로 향한다.


기대감이 낮았던 페루에서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일까, 다시 더워질 산티아고에서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높지는 않았지만, 페루에서 그랬던 것처럼 산티아고도 기대보다 훨씬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거라 믿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아타카마 사막이 있는 칠레.

그래서인지 산티아고로 날아가는 동안 보이는 뷰들이 정말 척박하고 삭막해보인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수많은 비행편을 비교했는데 유난히 칠레 산티아고 경유가 많았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니까 그 이유를 알것만 같다. 인천공항 못지 않게 잘 가꿔진 공항과 한 눈에 봐도 허브 공항이라는 느낌이 드는, 페루의 공항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 이제 나는 칠레에 왔다!

사실 산티아고를 여행지로 추천하지는 않는다는 글을 많이 봤다. 경유지로는 많이 방문하지만 여행을 할만큼 여행지가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에서 2박 3일이나 있는 이유는, 이 곳에 지인이 있기 때문이다. 칠레 대사관에서 근무하시는, 아는 삼촌의 도움을 받아 여행 중간에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공항으로 직접 픽업을 와준 삼촌 덕분에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마음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하필 에어알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데이터를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럴 때 삼촌이 데리러 나오지 않았다면 또 얼마나 마음 졸이면서 이동했을까.. 새삼 감사해졌다.



엄청나게 환대를 받았다. 맛있는 남미의 과일들이 가득! 삼촌의 딸들인 일명 솔솔이 자매도 오랜만에 보는 언니를 반겨주었다. 페루와 브라질에서 사온 선물들도 나누고 밀린 대화를 나눴다. 늘어지는 산티아고의 태양과 여유가 좋다. 무엇보다도, 여행 중이지만 잠시 한국에 돌아온듯한 편안함에 긴장이 풀려셔인지 계속 잠이 쏟아졌다. 그동안 잘 즐기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기호에 맞춘 아이브 노래 메들리와 함께 떠나는 산티아고 시내 드라이브.

삼촌은 Cherish가 좋다면서 너무나도 익숙하게 가사를 외웠다.

간판이 스페인어가 아니라면 대한민국의 신도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산티아고는 도시 중의 도시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차를 타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산티아고 시내를 달렸다.

삼촌의 일터인 칠레 대사관에도 들러보고, 신선한 과일이 각맞춰서 전시되어있는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 이 안정감이 너무 그리웠다.

저녁은 삼촌이 고기를 구워준다고 했다. 베란다에 있는 전기 그릴에서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와 여덟시 반이 넘어서야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이며 지는 해. 여유를 찾은 것만 같다.

우리를 주려고 아이들이 만들었다던 인절미도 먹어보고, 태어나서 먹은 고기 중에 손에 꼽힐 정도로 맛있는 고기도 배가 터져라 먹었다. 평소에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닌데다가 와인을 마시면 정말 빨리 취해서 웬만하면 와인은 피하는 편인데, 칠레에 와서 와인을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삼촌이 꺼내준 정말 좋은 와인을 곁들였다. 이럴 때는 내가 와인을 잘 알았다면 이 좋은 와인을 조금 더 즐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예솔이가 '아 맞다!' 하면서 방으로 뛰어가더니

Welcome to Chile 라고 써있는 종이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미 충분히 환대받은 느낌이었지만, 내가 이 여행과 삼촌네 가족과의 만남을 기다려온만큼 아이들에게도 오늘이 특별한 날이었겠구나, 싶어서 고마웠다. 고맙고 편안하고 안심되어서 아주 조금 눈물이 났던 것 같다. .








아홉시가 넘어서야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다솔이의 최애 간식인 까망베르치즈 구이와 하몬에 2차로 회포를 풀었다. 이미 조금 취한 것 같지만, 매일 잊지 않기 위해 쓰던 블로그도 잠에 취해 필사적으로 올렸다.

아직 산티아고에서 일정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서 삼촌네 가족에게 힘을 얻을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예솔이가 써준 편지를 여권 사이에 꽂아두고 남은 여행도 행복하고 무탈하기를 기원해본다.


너무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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