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에서의 두 번째 아침.
날씨가 추워서 조식 먹는 공간이 다소 썰렁했다. 간단하게 마련된 조식을 챙겨서 자리에 앉았는데 옆 테이블에서 익숙한 포르투갈어가 들렸다. 남미에서 포르투갈어가 들린다면 이것은 아주 높은 확률로 브라질 사람이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다.
내가 한창 브라질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엄마는 앳되어 보이는 한국인 여자 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때는 몰랐지, 쿠스코에서 만난 즐거운 인연이 될 줄은!
오늘은 오롯이 쿠스코를 즐길 수 있는 시내여행날이다. 다행히 나는 고산병으로 아프기는커녕 컨디션이 너무 좋았지만, 엄마는 손발 끝이 저리다고 했고 입술색이 조금 파래지는 것 같았다. 즐겨보는 예능인 [지구마불 세계여행]에서 곽튜브가 페루 쿠스코에서 고산병으로 고생할 때, 산소통이 효과가 좋았다는 걸 본 기억이 나서 근처 약국에 가보았다.
물을 사 먹는 것도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그려지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산소를, 그것도 매우 비싼 돈을 주고 사야 한다니. 여긴 고산지대이니 산소통의 수요가 꽤 있을 법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는 서울 한복판의 약국에서도 산소통을 매우 비싼 돈을 주고 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이비인후과에 있는 네블라이저 마스크에 텅 빈 듯한 깡통 캔을 결합해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산소가 들어있는 깡통 캔은 과연 내용물이 들어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지만, 산소니까 그러려니 해본다.
호기심에 한 번 들이켜봤는데, 민트향과 플라스틱 용기 특유의 냄새가 난다. 고산증세가 없는 나에게는 그냥 크게 한숨 들이마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엄마는 조금씩 혈색이 돌아왔다. 이것 또한 고산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여행 몇 달 전에 왓츠앱을 통해 한국인 전문 여행사로 유명한 파비앙 여행사에서 마추픽추 당일투어를 예약해 두었다. 마추픽추는 쿠스코에서도 한참을 이동해야 하는데, 모든 과정을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도 예약을 할 수 있지만 너무나도 많은 예약과 계획에 지쳐버린 나는 마추픽추만큼은 위탁을 하기로 했던 것.
미리 예약을 해두었으니 투어 전 날 사무실로 와서 대금을 지불하면 된다고 하기에 아르마스 광장 한편에 있는 여행사 사무실에 먼저 들렀다. 한국인 전문 여행사답게 간판과 사무실 곳곳에서 한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익숙한 듯 일정을 소개하고 바우처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마추픽추 입장권'을 작성하는 파비앙에게 한국어를 배운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유튜브에서 배웠다고 했다. 이제 보니 한국어 획순이 엉망진창인 걸 보니 필요한 단어들을 그림 그리듯이 익혀두었나 보다. 파비앙의 어린 딸은 한국인이 익숙한 지, 알이 큰 사탕봉지를 한 아름 들고 와서 '사탕~?'이라고 물었다. 따뜻하고 귀여운 파비앙 가족.
대금을 지불하고 나서 어제 미처 구경하지 못한 마켓들을 찾아 나섰다. 온 세상이 알파카와 라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알파카와 라마라는 이름에 익숙하지만 사실 모르는 게 많다.
첫 번째, 알파카와 라마는 구분하기가 조금 까다롭다. 알파카는 라마보다 덩치가 조금 더 작고, 귀의 모양이 조금 더 뾰족하다. 개인적으로는 알파카가 조금 더 빵실하고 친근하게 생겼달까.
두 번째, 라마 (Llama)는 사실 '야마'라고 읽어야 한다. 발음의 오류는 아마도 스페인어의 특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스페인어에서는 L이 두 개가 연달아 있으면 (LL) 더 이상 [ㄹ] 발음이 나지 않고 [ㅑ,ㅕ, ㅒ, ㅖ] 등의 발음으로 바뀐다. 그러니 Llama는 라마가 아니라 [야마]가 맞는 발음.. 이상 전공자의 알쓸신잡이었다.
페루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북마크 해둔 기념품샵은 다름 아닌 강아지용 판초를 판매하는 곳. 우리 집 귀여운 막내인 연두에게, 판초를 꼭 사다 주고 싶었다. 그리고 동네에서 매일 마주치는 코코, 바로, 하봉이에게 선물해 줄 넥카라도 하나씩 고르고 나니 부자가 된 기분이다.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강아지들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쿠스코의 날씨는 맑았다가 흐리기를 반복한다. 잠깐 볕이 드는 시간이면 온 도시의 색감이 막 페인트칠한 벽처럼 살아난다. 붉은 기왓장의 집들과 얼룩덜룩한 돌바닥에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 그리고 빨간 페루의 국기가 참 조화롭다. 쿠스코를 유난히 편애하게 된 건 아마도 빨간색이면 일단 사고 보는 나의 레드 악개 성향 때문인 걸까? 휴대폰 사진첩에는 페루 국기가 펄럭이는 걸 찍은 사진이 유난히도 많다.
전편에서 쿠스코의 골목 곳곳에는 강아지가 많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며칠 있다 보니 계속 눈에 띄는 강아지들도 있다. 푸른 잔디밭에서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아이에게 폭 안겨 사랑받는 이곳의 강아지들이 사는 삶은 어쩌면 모든 강아지들이 꿈꾸는 진정한 무지개다리 넘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일 하루 더 쿠스코에 머물기는 하지만, 여유롭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마지막 밤이라서 좋은 식당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 구글에서 예약이 막혀있어서 식당을 찾아가서 예약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캐치테이블과 네이버 예약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좋은 자리를 약속받고 숙소에 잠시 들렀다가 나오려는데, 아침에 만났던 한국인 여자 둘 중 한 명이 뛰어나와 오늘 같이 저녁을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여행하면서 만난 한국인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연락처를 받고, 아까 예약해 두었던 식당의 예약인원을 4명으로 바꾸었다.
시간 맞춰 식당으로 가니, 내 이름인 Leticia로 예약카드가 놓여있었다. 아르마스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주 좋은 창가자리에 앉게 되었다!
한국인 여자 둘의 이름은 지영과 연두.
오랫동안 준비하던 시험을 끝내고 남미여행을 왔다고 했다. 남미여행이라고 한다면 보통 나처럼 여러 나라의 여러 도시를 돌면서 정석적인 (?) 여행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둘은 각자 가고 싶은 도시만 선별해서 페루의 쿠스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이 세 도시만 일주일 씩 여행한다고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주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여행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각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만큼의 이야기는 하지 못했지만 그건 한국에서 마저 풀기로 하고.
브라질에 있으면서, 해외에서 만나는 한국인이 얼마나 귀한지 깨달았다. 그 이유는, 특히 남미에서 만나는 인연은, 가벼운 마음으로는 오기 힘든 대륙이니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용기와 관심이 하나의 공통 관심사가 되기 때문에 더 오랜 시간 인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영과 연두와도 이렇게 오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쿠스코의 밤은 정말 아름답다. 쌀쌀한 날씨에 코끝이 조금 시리지만, 붉게 물든 아르마스 광장과 쏟아지는 별처럼 콕콕 박힌 불빛들이 너무 예뻐서 괜히 아쉬운 마음에 아르마스 광장을 조금 더 걷다가 들어가기로 했다.
내일은 고대 잉카의 공중 도시, 마추픽추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