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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 - 쿠스코

by 레띠쌰

리마에서 쿠스코로 떠나는 날.

혹시 모를 고산병이 두려워 약도 꼼꼼하게 챙겨먹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낮 시간대여서인지 매우 붐비고 정신이 없었다. 신시가지인 미라플로레스를 조금만 벗어나도 교외의 느낌이 물씬 난다.


모자를 힙하게 얹은 우버 드라이버는 뭔가 쉽게 말 걸기 힘든 느낌이라 조용히 리마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솔직히 말하면, 리마는 여행의 시작점으로서의 의미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다른 쟁쟁한 도시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였을까, 스페인어 간판이 보인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없는 기시감때문에 여행을 했다기보다는 긴 여행을 위한 예열을 잘 했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랬으니, 앞으로의 여행이 더 기대된다.

대한민국의 기업이 전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여행을 하면서 종종 한국제품들을 보는 것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특히 남미 전반에 한국 기업이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는 건 이번 여행을 통해서 여실히 깨달았다.


리마의 호르헤 차베스 공항은 작지만 알차다. 나름 페루에서 가장 큰 공항인데, 공항 규모에 비해서 이용객이 많아 시장통처럼 시끌시끌하다. 국내선과 국제선 게이트가 구분이 없지만 누가 쿠스코로 향하는 여행객인지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쿠스코로 향하는 게이트 앞에서는 베낭을 맨, 누가봐도 한국인인 할아버지 (라고 하기엔 젊은, 아저씨라고 하기엔 연세가 있어보이는) 대여섯분이 상기된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계셨다. 이들의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마음으로 베낭을 메고 이곳까지 왔는지는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만의 소설을 써보았다. 이들은 초등학교때부터 알고 지낸 아주 오랜 친구들이며, 퇴직 이후 어렸을 적 꿈이었던 마추픽추를 함께 보기 위해서 앞뒤로 가방을 메고 먼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몸 크기만한 베낭을 앞뒤로 메고 여권을 손에 꼭 쥔 채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이들을 보며 쿠스코 여행을 조금 더 기대해본다.


한 시간 정도의 짧은 비행 후에 쿠스코에 도착했다.

쿠스코의 해발고도는 3,400m. 한라산보다도 1,400m 이상 높이 있는 도시.

여행을 하면서 가장 걱정되고 통제할 수 없었던 변수 중 하나는, 내가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는 사람인지 아닌지 여부였다. 이렇게 높은 도시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고산병이라는 걸 겪어본 경험도 없고, 기대했던 도시 중하나인 쿠스코를 고산병때문에 온전히 즐기지 못하면 조금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리마에서 미리 챙겨온 고산병 약을 비행기 내리기 전부터 먹고 내려서인지 착륙하고 게이트 밖으로 나왔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 숨이 가쁜 정도.


수화물 찾으러 가는 나에게 너무나도 정확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는 공항 직원을 보아하니 이곳이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임이 분명하다. 여긴 지구 반대편인데 어떻게 그리도 많은 한국인이 쿠스코까지 왔을까.

쿠스코 공항은 리마 공항보다도 훨씬 작고 한산하다. 공항 이용객도 별로 없어서 우버를 부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바닐라향이 진하게 나고 번들번들한 가죽 시트의 우버를 타고 쿠스코 시내로 이동하는 길. 확실히 숨을 70% 정도만 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선이 없고 클락션이 시끄럽게 울리는 도로 위에서 한참을 시간을 보내다가 40분 정도 걸려서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이 있는 시내에 도착했다.







이곳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돌바닥이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에는 아주 최악의 조건일지도 모르겠으나 돌바닥과 맑은 하늘, 낮은 건물들이 조화롭다. 무거운 캐리어를 덜덜덜 끌면서 숙소로 이동했는데, 쿠스코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아르마스 광장에서 걸어서 2분 거리의 골목에 있다.

디즈니 영화 <엔칸토>에 나올 것만 같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숙소였다. 예약할 때 곳곳에 식물이 있는 것, 베이지 벽과 진초록 문과 창문이 예뻐서 예약했는데 사진과 똑같았다. 채광이 좋아서 숙소 한가운데에 빛이 스며드는 게 예뻤다.


고산병에는 코카잎차가 효과가 좋다고 한다. 딱히 고산병 증세는 없지만 괜히 코카잎차 하나를 우려 마시면서 무사히 쿠스코에 도착한 걸 자축해본다. 코카잎차는 녹차랑 민트 사이 어디쯤인데 나는 차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경험해본 걸로 만족이다.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과 골목 곳곳에는 강아지들이 많다. 강아지라고 하기엔 너무 덩치가 큰 거 아니냐 하지만, 나에겐 그저 다 아기 강아지처럼 예뻐보인다. 이곳의 강아지들은 온순하고 여유롭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아르마스 광장을 누비면서 사람들에게 예쁨받고 싶어하는 눈빛을 잔뜩 보내기도 하고 잔디밭에 누워서 유난히 가까운 쿠스코 하늘을 즐기기도 한다.


집에 있는 연두가 너무너무 보고싶었다. 아! 연두는 우리집에 있는 아기 푸들 강아지. 브라질에서 일하느라 거의 반 년을 떨어져있다보니 애틋함이 최고치를 찍은 상황이라, 안그래도 강아지를 좋아하는 나는 세상의 모든 강아지들이 우리 연두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강아지들아 행복해야 해!


여긴 아르마스 광장.

페루를 포함한 남미의 여러 도시에는 아르마스 광장 (Plaza de Armas)가 있다. 스페인이 남미 대륙의 일부분을 식민지배하면서 비슷한 형태로 식민 도시를 설계했는데, 중심에 커다란 광장을 두고 주변에 정부 청사, 대성당 등을 배치해서 이 곳을 아르마스 광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스페인어로 아르마스 (Armas)는 무기를 뜻하는데, 아르마스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곳이 과거에 군인들이 무장하고 모이는 군사 집결지의 역할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페루와 남미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아르마스 광장은 스페인 식민 시대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광장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공간이다.

다양한 식당이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 싸고 있다. 그 중 구글 평점이 좋은 곳을 찾고, 아르마스 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테라스가 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정갈하고 감칠맛 좋은 음식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피스코 사워가 정말 맛있었다.


피스코 사워는 페루에서 (혹은 칠래에서) 전통주로 생산되는 포도로 만든 브랜디의 일종이다. 페루와 칠레 양쪽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해서 피스코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라고 한다. 피스코 사워는 이 전통주를 베이스로 하여 만든 칵테일인데, 라임의 상큼한 맛과 피스코의 과일맛이 잘 어우러져서 술술 들어간다. 페루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하는 술!


쿠스코에 오니 진짜 여행이 시작된 느낌이다. 여유롭게 광장을 바라보며, 낮게 깔린 구름을 보니 쿠스코가 더더욱 좋아졌다. 여행을 준비할 때 쿠스코에서만 한 달 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왜 굳이 높은 지대에서 한 달이나 살고 싶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와보니 이곳은 정말 여유롭고 살기 좋아서 나도 이곳에서 좀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넉넉하게 쿠스코 일정을 잡아두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쿠스코 한 바퀴.

아르마스 광장에서 산 페드로 시장까지 가는 길은 눈이 즐겁다. 페루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아기 알파카를 품에 안고, 소정의 페소를 받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준다. 뜨거운 쿠스코의 햇빛을 피해 잠시 그늘에서 휴식을 취한 이들의 모습이 가장 페루스럽다.

산 페드로 시장은 쿠스코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기념품의 성지로 유명하지만 그것 외에도 시장 음식, 식재료 등도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기념품'이 항상 문제다. 여행을 기념하고자 구매하는 것이 기념품인데, 언젠가부터는 내가 여행을 다녀온 사실을 아는 이들에게 뭐라도 하나 선물해줘야 하는 일종의 관습이 되어버렸다. 정말 마음이 가는 사람이라면 부탁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 사람을 떠올리며 알맞은 기념품을 사다주고 싶지만, 응당 줘야하는 사람들에게 뭐라도 하나 쥐어줘야 할 것 같아 구매하는 기념품 쇼핑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애매할 때는 알파카 또는 라마 인형이 최선이라는 것.



뒤늦게 시차적응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는 잠시 숙소에 들어가서 자유시간이 생겼다. 아르마스 광장의 돌계단에 걸터앉아서 사람 지나다니는 것도 보고 강아지 지나다니는 것도 보고. 낮은 건물들과 붉은 지붕이 너무 예쁘다.


고산병 따위는 나에게 없는 병이었다. 숨이 좀 차지만 머리가 아프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도가 높으니 평균 기온 6-7도, 최고 기온 10도 남짓이라 서늘하고 추운 날씨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딱 맞는다. 시원하고 평온하다. 여기서 아주 오래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저녁은 숙소 바로 앞 한식집에서 먹기로 했다. 순두부찌개와 제육볶음이 정말 맛있었다. 물론 한국에서 먹는 맛과는 재료도 다르고 여러모로 여건이 좋지 않아 100% 같을 수 없지만, 그래도 외국 한식당인걸 감안하면 정말 맛있었다.


식당에서 주문을 받아준 한 한국인 청소년 (인 것 같았다)은 아마도 부모님의 식당 경영을 돕는 듯 했다. 어떤 이유로 지구 반대편, 그것도 페루 쿠스코에서 한식당을 열게 되신걸까, 이들의 사연이 궁금하지만 굳이 묻지 않고 속으로 삼켜보았다.

아르마스 광장을 밝히는 붉은 등과 밝게 불을 켜고 손님을 맞이하는 가게들과 더불어서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싼 분지 곳곳에 심어져있는 집에서 불을 켜고 밤을 맞이하는 야경이 정말 아름답다. 남미의 밤이라고 하기에는 평화로워서 유일하게 밤에 걸어다닌 도시이기도 하다.


가장 걱정했지만 그래서인지 너무나도 빠르게 사랑에 빠져버린 도시, 쿠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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