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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 마추픽추

by 레띠쌰

오늘은 마추픽추로 떠나는 날.


아껴두었던 가디건을 꺼냈다. 이 가디건은 브라질에서부터 페루 여행을 기다리며 직접 뜨개한 옷, 일명 '페루 가디건'이다. 페루의 국기를 닮은 쨍한 빨간색과 오묘한 잉카 스타일의 배색. 처음 만들어 본 배색 니트인 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마음에 드는 가디건이 아닐 수 없다.


전형적인 페루 여성들처럼, 부스스해진 머리를 양갈래로 야무지게 땋았다. 나는 머리숱이 많고 금방 머리가 자라는 사람인데, 브라질에 있었던 7개월동안 머리 손질을 하지 않았더니 단발이었던 머리가 어깨가 한참 넘도록 자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의 초가을 날씨.

한국인 여행객을 많이 상대하는 '한국인 전문 여행사'답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손하트를 만들어 흔쾌히 함께 사진을 찍어준 파비앙 아저씨.


원래는 아르마스 광장에서 만나서 큰 밴을 타고 함께 출발한다고 들었는데 엄마와 나뿐이었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오늘 마추픽추 투어를 예약한 사람이 우리 뿐이다! 덕분에 프라이빗 투어를 하게 됐다 럭키!

쿠스코 시내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꽤나 멀고 험하다.

쿠스코로 가기 위해서는 차량, 기차, 버스 이렇게 세 개의 교통수단을 거쳐야 한다. 쿠스코 시내에서 기차역이 있는 오얀따이땀보 (Ollantaytambo) 까지 차량으로 2시간 이동, 오얀따이땀보에서 마추픽추가 있는 마을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Aguas Calientes) 까지 기차로 1시간 30분, 그리고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서 드디어 마추픽추까지 전용 버스로 30분. 그러니까 편도 4시간이 걸려서야 도달할 수 있는 그야말로 신비의 공중도시가 맞는 것이다.

오얀따이땀보에 거의 가까워질쯤 저 멀리 절벽에 하얀 누에고치같은 점들이 몇 개 붙어있는 걸 볼 수 있다. 저건 다름 아닌 호텔이다..! 즐겨보는 [지구마불 세계여행]에서 곽튜브와 강기영이 이 호텔에서 묵는 장면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 지나가면서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더 충격이다. 체크인은 암벽등반으로, 체크아웃은 스카이라인으로 하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특이한 호텔.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내 인생에 절대 도전하지 않을 숙소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 지식과 간접 경험을 확장시켜주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반가울 뿐이다.





이곳은 마추픽추행 기차 (페루레일 또는 잉카레일)역이 있는 오얀따이땀보.

기차역을 따라서 작은 상권이 형성되어있다.

기차 시간에 맞춰서 전통 의상을 입은 분들이 30m 남짓 되는 기차역까지 가는 길로 데려다준다. 약간의 억지 텐션이지만 여행 분위기를 내기에 충분하다.

고급 게이밍 소파처럼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와 깨끗하게 관리된 잉카레일을 타고 마추픽추의 마을로 간다!

양옆과 위에 나있는 창문덕분에 개방감이 좋다.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공연이 시작됐다. 나름의 스토리가 있는데, 뛰어난 전사인 오얀따이가 잉카 최고의 미녀 쿠시와 사랑에 빠지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짧지만 강력한 이야기.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이들은 다시 스튜어디스와 스튜어드로 돌아갔다. 이건 마치.. 어릴 적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굳게 믿던 내가 미술학원 원장님이 산타로 변장하는 모습을 봐버린 듯한 느낌..


기차 안에서는 맥주도, 그 유명한 잉카칩 (감자칩)도 주문할 수 있다. 물론 시장가격의 몇 배이지만..

마추픽추의 관문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로 가는 길에는 비가 조금씩 내렸다. 비가 오고 날이 흐리면 마추픽추를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들어서 조금 걱정됐지만, 여행 내내 따라다녀준 날씨 운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 도착하니 비가 오고 매우 습하다. 어디선가 마추픽추에는 우산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걸 본 것 같아 애초에 챙기지도 않아서, 급하게 우비를 사입었다. 불필요한 지출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혹여나 나중에 이과수에 갔을 때 필요할 수도 있을거라는 합리화를 하면서.


아구아스 깔리엔떼스 (Aguas Calientes)는 스페인어로 '뜨거운 물'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이 곳은 뜨거운 강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마을 곳곳에 온천이 있다고 한다.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는 비가 자주 온다는 걸 보면, 따뜻한 물이 비와 연관이 있는가보다.

티켓에 적힌 마추픽추 입장 시간에 맞춰 걸린 팻말 뒤로 줄을 서있으면, 5분 간격으로 이동하는 셔틀버스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마추픽추로 실어나른다. 이 동네는 정말이지 마추픽추 하나만으로 모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동네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마지막 관문인 셔틀버스를 타고 마추픽추로 올라가는 길. 아주 협소한 길을 따라서 큰 버스가 구불구불 올라가는데, 기사님들이 매우 베테랑이시다. 길이 좁고 아래 낭떠러지가 훤히 보여서인지 지금 얼만큼 하늘과 가까워지고 있는지 아주 잘 알 수 있다. 비가 온 직후라 안개가 자욱한데, 들쭉날쭉한 산봉우리와 어우러지니까 산신령 혹은 나비족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다.


입구에 도착해서, 파비앙에게 미리 전달받은 연락처로 왓츠앱을 보냈다. 오늘 우리의 마추픽추 가이드가 되어줄 이 분의 이름은 후안 까를로스! 입국심사할 때처럼 마추픽추라도 써있는 도장을 입장권에 꽝 찍어준다.

저 멀리 마추픽추가 보인다. 많은 계단을 오르고 내려야 하는데, 지팡이를 짚고 온 어르신들이 정말 많았다. 이 분들의 일생일대 소원일지도 모를 마추픽추. 누군가의 버킷리스트일지도 모를 이 곳.


지붕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는 오른쪽의 이 곳은 외양간으로 썼던 건물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곳곳에 강아지와 알파카, 라마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심지어 쿨쿨 자고 있기도 한다. 누군가의 꿈의 장소에서 한가롭게 잠을 청하는 이 강아지는.. 팔자도 이런 상팔자가 없다!






운이 나쁘면 구름에 가려져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데

비가 추적추적 오던 아랫동네와는 달리 이 곳 마추픽추는 맑음이다!


이곳에서는 어린아이의 해골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추측해보건대 이곳은 철저한 계획도시로, 필요에 의해 이주한 사람들만이 살았던 일종의 커뮤니티 같은거였을 것이라고 한다.


왜 하필 이 높은 곳에 도시를 지었을까?

수많은 가설이 있지만, 후안 까를로스 아저씨에 의하면 이들은 안전을 위해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원래 마추픽추가 있던 이 곳도 하나의 산봉우리였는데, 지진으로 인해서 돌들이 흩어졌고, 그 덕분에 큰 산을 양 옆에 둬서 바람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된 것이다. 이곳까지 나무나 돌을 이고지고 올 수 없었을텐데도 이만큼의 건설을 이뤄낼 수 있었던 건 전부 지진으로 인해 흩어진 돌을 깎고 다듬어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페루를 식민지배하던 스페인 사람들은 쿠스코에 살면서도 이곳에 대해서 400년 이상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당시 페루사람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은 좋지 않은 이미지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식민지배를 당했으니?) 숨겨진 공중도시가 있다는 사실을 스페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의 예일 대학교에서 재직 중이던 하이럼 빙엄이라는 교수가 마추픽추 근처의 우루밤바라는 도시를 탐사하던 중, 한 지역주민으로부터 마추픽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게 마추픽추 발견의 시발점이라고들 얘기한다. 하이럼 빙엄 교수의 발견 덕분에 마추픽추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지만, 사실 이런 공중도시는 마추픽추보다도 더 높이, 더 깊이 숨겨진 곳에도 아주 많다고 한다.

이 곳을 직접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후안 까를로스 아저씨의 뒤를 졸졸 좇아 재미있는 잉카인의 삶을 엿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무엇보다도 잉카인의 시선에서 이 신비로운 공중도시에서 그들이 했을법한 고민과 생각을 떠올려보는 것이 즐거웠다. 이런 대자연 앞에서는 당장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할 지와 같은 고민보다는 대자연앞에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반성하고 겸손해지는 시간이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정이 다 되어서 쿠스코로 돌아왔는데, 숙소 방문 앞에 비닐봉투 하나와 편지가 걸려있었다. 전 날 지영과 연두를 만나 아직 피카로네스 (페루식 찹쌀도너츠)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생각이 났는지 걸어두고 간 것이었다.


스치던 인연이 이토록 진한 향기를 남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께추아어로는 작별인사인 안녕! (스페인어 : Adios)와 같은 말이 없다고 한다.



대신, Añay machupicchu kutimusq!

(고마워 마추픽추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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