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사랑 같은 꽃. 그리고 지금은 누구든 이 꽃을 보면 나를 가장 먼저 떠올려주는 게 좋은 꽃.
라넌큘러스.
실크 같은 하늘하늘한 꽃잎이 겹겹이 300겹도 넘는 이 얼굴에 나는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작은 꽃 얼굴에 어쩜 그렇게도 많은 꽃잎이 켜켜이 쌓여있을까 궁금하고 신비롭고 경이롭기까지 했다.새로운 꽃을 알게 된 그 기쁨에 그 아름다움에 감격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꽃 사진만 찍어도 어떤 꽃인지 꽃의 이름을 안다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어플은 없었다. 한눈에 반하고 만 그 꽃의 이름을 기필코 알아내고 싶었다.
꽃박람회의 화단에 심겨진 꽃이었는데 그 꽃의 이름이 궁금해서 꽃해설사를 찾아 겨우 겨우 이름을 알아냈다.
그때만 해도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것을 어려워했던 그런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버스기사님에게도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가는 지 물어보는 게 부끄러워서(?) 일단은 타고 봤을까.. 그랬던 내가 꽃이름을 기어코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냥 예쁘네. 에서 끝났다면 내 일상에 꽃이 찾아오는 일이 있었을까? 두 눈에 불을 켜고 꽃의 이름을 알아낸 것이 잘한 일일까? (가끔 꽃일이 힘들어질 때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불러주고 싶은 것처럼 그 꽃의 이름을 아는 것에서부터 내 일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꽃의 이름이 '라넌큘러스'라고 한다. 지금은 이름이 왜 이렇게 어려워?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이네...라고 생각도 되지만 그때만 해도 콩깍지가 씌였다. 그 꽃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이름부터 로맨틱하네 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쉽고 간단한 이름이 아니라 낯설고 어려운 이름이라 내게는 더 특별했을지도 모른다. 나만 그 꽃 이름을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특별했다.
그렇게 꽃이 내 일상에 살며시 들어왔다.
까막눈일 때는 안보였던 글자들이 한글을 막 뗀 아이에겐 온 세상에는 글자만 가득하네? 라며 보이게 되는 것처럼 나 역시도 그랬다. 전에 스쳤을 테고 지나쳤을법한 그 꽃이 보이기 시작했고 온 세상에는 온통 그 꽃만 있는 것처럼 내 눈에 자꾸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은 소유하고 싶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이름을 알고 싶고, 그 사람의 일상에 함께하고 싶다가 결국은 소유하고 싶은 것처럼 나는 그렇게 라넌큘러스에 반해 버렸고 내 공간에 놓고 두고두고 바라보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꽃의 가격 따위는 상관없었다. 지금이라면 겨울에는 라넌큘러스가 비싸니까 봄의 끝무렵에 라넌큘러스를 실컷 사야지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초겨울(가장 비쌀때) 라넌큘러스가 나오자마자 설레기 시작했다. 일상의 작은 행복이 바로 꽃이었다. 매일 내가 있는 장소에 눈에 비치는 모든 장소에 나누어서 꽃을 꽂아 놓았고 평범했던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 그 꽃만 보면 나는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몽오리였고 작디 작았던 그 얼굴이 조금씩 커지고 꽃잎이 드레스처럼 펼쳐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어떤 라넌큘러스는 중간에 고개가 꺾이기도 했지만 아쉬워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줄기를 짧게 잘라 밥그릇에 동동 띄워보기도 했다. (라넌큘러스는 줄기가 비어있어서 가끔 줄기가 꺾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꽃을 집에 들이고 나서 알게 되었기에 아쉬워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꽃이 점점 만개하며 색이 연하게 변하는 과정을 보는 것도 꽃을 일상에 들인 나만이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만개한 라넌큘러스의 떨어진 꽃잎이 책상 위에 우수수 떨어지면 그마저도 아름다웠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그렇게 피고 지는 일생을 보며 나는 피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고 그 행복을 함께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나 혼자서 내 공간 안에서 보는 꽃도 좋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 예쁜 아이들을 혼자만 보는 것은 아닌가 미안해지기 시작했달까?
그 예쁨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지켜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나중에 들게 되어서 그 뒤로는 꽃 선물을 하게 되었다.
사랑은 이름을 알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꽃과 만나는 방법을 몰랐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내게 첫사랑 같은 그 꽃이 나오는 그 계절이 되면 나는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