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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저투 Sep 07. 2024

로망을 갖고 싶어서 소심한 저항을 한다.



원피스보다는 츄리닝이 좋고,

단팥죽보다는 호박죽이 좋고,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이 좋다.          



이렇게 말하지만 원피스를 입어야 할 상황에선 원피스를 입고, 누군가 맛있다며 단팥죽을 먹어보라는 권유에 한 숟갈 입에 넣고 함박웃음을 짓고, 편리함에 빠져 아파트에 살고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겁 많고, 귀는 얄팍하고, 그래서 주변에 의해 흔들리기도 하며,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대세를 좇아가며, 정작 내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빌런 역할만 맡았던 나약한 존재. 그렇게 나는 점점 작아져 갔다. 앞에선 한 마디도 못하고, 뒤에서 소심하게 중얼거리듯 불만을 토해내는 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의 저항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3~4년 전,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가사 일 분담'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남편의 주장은 자신이 돈을 더 많이 버니까, 돈을 적게 버는 내가 가사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어째서지?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시간의 개념이야. 당신의 24시간과 나의 24시간은 똑같아. 함께 일을 하면, 가사 분담을 함께 하는 게 맞아. ”       


   

식당을 박차고 나왔다. 혼자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찌나 서럽던지 눈물을 펑펑 흘렸다. 아이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도 괘씸하다. 마치 시어머니가 빙의된 것처럼,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남편의 발언은 가사의 분담을 경제적 기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나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역할 분담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각자의 수입이 아니라 가정 내에서의 시간 배분과 역할에 대한 합의를 강조하는 거다.     


저 논리대로라면 맞벌이 당시 내가 가사 일을 많이 했던 게 당연했던 거고, 전업주부로 삶을 시작한 후에도 내가 가사 일을 전적으로 도맡아 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아이를 키우며 운동과 취미 생활을 즐기는 안정된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무심한 발언이 마치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하지 않아도 될 사회 재취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러 교육을 수강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틈틈이 알바도 하는 등, 남편을 향한 소심한 저항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런 내막을 모르는 이들은 나를 보며 ‘일에 대한 로망’이 있는 여자 정도로 판단한다.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나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직장 생활을 해 봤던 사람으로, 일 따위에 로망 같은 건 없다는 걸 잘 안다. 오히려 일에 로망을 불어넣으려고, 내가 좋아하는 걸 찾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있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오래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다. 맘처럼 잘 되지 않는다. 좋아한다 · 즐겁다 생각했던 것들이, 그래서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타인의 말 한마디에 의해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신감이 바닥을 친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앞으로 사회에 진출하려는 여성들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충분한 준비 없이는 그만큼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아니,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오랜 휴식 후 사회로 나아갈 때 한 번쯤은 이러한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면에서 자존감을 갉아먹는 무언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내가 사용했던 방법이 있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떠오른 아이디어다. 그날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는데, 너무 떨려서 발표를 잘 못했던 날이었다.     






나는 항상 우리 집 강아지한테 끌려 다닌다. 잠시 멈춰 서서 볼일을 본다거나, 냄새를 맡는다거나,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내가 강아지보다 뒤처져 있다.     


강아지는 때로 주인보다 앞서거나 뒤처지며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결국에는 주인 곁으로 돌아온다. 이는 주가가 단기적으로는 변동을 보일 수 있으나, 결국 기업의 내재 가치와 수렴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강아지에 비유한 경제 용어다. 


이것을 나에게 도입했다. 나를 기업에 비유하고 강아지를 주가로 본다면, 현재 나는 고평가 된 상태일까? 그러나 강아지인 주가는 항상 빠르게 앞서 나가며 자꾸만 나를 재촉한다. 이는 내가 앞으로 더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시장의 판단을 반영하여, 주가가(강아지)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터무니없고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뭐, 나 혼자만의 생각인데 상관없다. 울적한 마음이 해소되고 자존감이 살아나니 효과는 최고다. 그 누구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자존감 올리기’ 방식을 생활 속 구석구석 심어놔야 한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만큼 자존감은 핵심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가를 즐기러 간 장소에서 오히려 의문투성이로 인해,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하곤 한다. 극장에서 영화가 이해할 수 없는 엔딩으로 끝났을 때, 미술관에서 난해한 그림을 보았을 때, 무용수의 춤이 무얼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작가 · 미술가 · 화가들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작품을 통해 혼을 불어넣고, 그 안에 고유한 자신만의 상징들을 심어놓는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러한 개념에 가깝다. 내 글을 보고 누군가 공감하고 이해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감사하다. 아직 글쓰기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부족함을 채워 넣을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내가 대문 밖으로 나가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었으며,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어떤 전환점을 맞이했는지.  누구를 가르칠 마음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 단지, 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이 다르듯, 슬픔도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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