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는 산에 갈 때마다 레깅스를 즐겨 입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츄리닝을 입기 시작했다. 나처럼 갑자기 살이 찐 것도 아니고,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데 말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인터넷 댓글에서 허벅지 굵기와 종아리 굵기가 똑같은 여자들에 대한 비난을 보고 상처를 받았던 거다. 그 댓글이 본인을 지칭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레깅스를 입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음모에 빠지는 순간, 상식을 벗어난다. 편협한 생각과 지적 우월감이 상식이 들어올 자리를 없애 버린다. 유명대학, 좋은 직업, 뛰어난 실적을 지닌 사람은 특별히 상식을 벗어나지 않도록 더더욱 자신을 살펴야 한다.
돈의 속성 p.267
위 내용과 동일한 상황은 아니나, 친구는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불특정 다수가 쓴 글을 자신과 동일시해 버린 것이다. 물론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성향이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이 만든 음모에 빠져버린 거다. ('음모'라는 두 글자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그저 작가의 표현이려니...)
우리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의 말에 의해 행동이 좌지우지되곤 한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 특히 엄마들에게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엄마는 무조건 집안에서 조신하게 살림해야 한다', '엄마가 책을 읽어야 아이도 책을 읽는다' '며느리가 그래서 내 아들이 그런 거다' 같은 말들이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나, 그렇다고 완전히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말들은 여성을 고립시키고,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 결국, 위축된 엄마의 태도가 아이에게 전이된다는 걸 모르는 게 문제다.
나의 경우, 코로나 기간 동안 약 2년간 150여 권의 책을 읽었다. 책뿐만 아니라 신문과 보고서도 읽었으니, 읽은 글자 수는 어마어마하다. 식탁 위에 책들을 쌓아놓고 읽는 나를 보고 아이는 "엄마는 무슨 서울대 교수님 같아"라고 말했다. 그 말이 조금 뿌듯했다. 흔히들 말하는 '엄마가 책을 읽어야 아이도 책을 읽는다'를 나름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처음엔 나의 성황에 못 이겨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고 읽던 아이도, 시간이 지나자 도서관에 가는 걸 제법 즐거워했다. 도서관에 가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책을 고르고, 함께 앉아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우리 가족만의 작은 의식처럼 자리 잡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조금씩 시들시들해졌다. 어쩌면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함께 도서관에 가자고 한 나를 보며 보며 부담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꼭 저렇게 많은 책을 읽어야 하나?" "꼭 도서관에 같이 가야 하나?"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
아빠도 함께 해야 한다는 나의 집념은 때로는 부부의 싸움이 되기도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책 읽기의 즐거움을 전하는 방법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각자의 취향에 맞는 책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그러니까 내가 힘주어 말하고 싶은 건, 이런 변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 결코 여자인 엄마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와 책을 둘러싼 작은 변화조차 그렇거늘, 하물며 한 사람의 삶 전체, 한 여성이 다시 사회로 나가는 일은 어떻겠는가.
그때 필요한 건, 엄마의 성실함만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시선과 구조가 함께 바뀌는 일이다. 사회적 통념과 편견은 특히 경력단절 여성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오랜 시간 가정에 머물다 다시 사회로 나가려 할 때, 우리는쉽게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는다.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집안일은 누가 하지?"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솔직히 사회로 나가는 것이 귀찮고 두렵다.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평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취미 생활을 영위하고, 나만의 시간을 즐기며 지낸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생기고,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거라 믿는다.
결국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거창한 외부의 음모가 아니라, 내 안에서 자라나는 편견과 자기 검열이다. "엄마는 이래야 해", "여자는 저래야 해"와 같은 말에 휘둘리지 말고, 나의 가치와 능력을 믿어야 한다. 각자의 상황과 조건이 다르듯, 우리의 선택과 삶의 방식도 다르니까. 그러니 사회가 들이대는 잣대보다, 나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먼저 믿어야 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 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니까! 엄마로서,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나의 가치를 스스로 정의하고 싶다. 그러니 세상아, 여성에게 부여한 고정관념을 이제 그만 거두어 주려무나.
나는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