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돌이 Jul 20. 2021

프로베라를 먹으면서

생리 유도를 위해 처방받은 약은 '프로베라'였다. 이전에도 다낭성 난소증후군 때문에 생리 유도를 해본 적은 있지만, 그때는 엉덩이 주사나 피임약으로 했기 때문에 이 약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찾아보니 프로베라는 자궁 내막과 관련된 약인데, 처방되는 케이스가 아주 다양한 것 같았다. 누군가는 자궁 내막을 두껍게 해주는 약이라고 받아왔고, 누구는 자궁 내막을 탈락시켜야 한다고 해서 받아왔다고 했다. 배란을 아예 안 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배란유도제는 아니라고 했고, 확실하게 피임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제까지 받았던 약과 주사들은 비교적 쓰임새가 명확해서 난포를 키우게 하고, 난포를 터지게 하는 등 주요 목적이 모든 환자에게 거의 동일했다. 근데 이 약은 다양한 목적으로 쓰이는 것 같았고, 그 기전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내 의학/약학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이제까지의 약들과는 다른 녀석이라고 느껴졌다. 






수요일 아침에 병원에 다녀온 후 목요일, 금요일은 모두 재택근무여서 한결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너무 움직임이 없어서 문제가 됐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난포를 키우기 위해 그동안은 즐거운 마음으로 걷기도 하고, 의무감으로 걷기도 하고 아무튼 산책은 자주 했었는데, 이제 될 대로 돼라, 더우니 집에만 있겠다는 마음으로 나무늘보처럼 지냈다. 그리고 토요일도 지난 주말부터 피로가 쌓여있는 남편과 함께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냈다. 마음 한 켠에는 또 스스로를 못나게 생각하면서 '뭔가 해야 하는데!'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보다 게으름이 더 힘이 셌다. 


토요일 밤에 일찍 잠든 탓에 일요일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간단히 빵으로 아침을 먹고 다시 침대에 눕자 갑자기 우울감이 심하게 느껴졌다. 나흘째 집에 있으면서도 집안일을 게을리해서 집안이 엉망이고, 외출도 운동도 안 하고 너무 생산성 없이 산다고 느껴졌다. 갑자기 엄마 아빠도 보고 싶었다ㅠㅠ 그런데 코로나라서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 슬퍼졌다. 눈물이 줄줄 나서 참지 않고 흑흑 울었다. 억지로 참지 않고 그냥 울어버리고 다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말도 없이 혼자 울고 있는 나를 보고 크게 놀라지도 않고 살살 달래주었다. 이십 분 정도 그렇게 울고 나서 정신 차리자는 마음으로 씻고 나왔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도 있던데, 씻고 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이걸 알면서도 왜 휴일에는 늘 씻기가 귀찮은 건지.....


힘을 내서 점심으로 김밥을 싸 먹고, 남편의 제안대로 드라이브를 갔다. 며칠 동안 집 안에만 있다가 바깥공기를 쐬면서 청명한 하늘을 보니 저절로 마음이 상쾌해졌다. 한적한 동네로 차를 몰고 가서 산책도 하고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었다. 요즘의 내 마음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남편의 일과 요즘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눴다. 밖에 나오니 역시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때 즈음의 우울감과 나쁜 컨디션이 프로베라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약을 복용하고 2~3일째 날과 6일째 날에 아주 기분 나쁜 생리통 같은 복통이 있었다. 요즘 들어 통 가지 않았던 난임 카페에서 약 이름을 검색해보니 프로베라를 먹으면서 나처럼 생리통 같은 통증을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배가 아파 컨디션이 다운되어 있을 때 바로 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외부 귀인을 했다면 나를 그렇게 탓하면서 더 울적해지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너무 집 안에만 있었던 것도 부정적인 마음을 더 크게 만든 요인이었던 것 같다. 지난해부터 재택근무를 하면서 우울감이 심해졌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생각만큼 내가 엉망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데, 왜 이렇게 '생산성이 없다'라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지 참.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틈틈이 식사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름대로 에너지를 들여서 더 건강하게 먹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기록한다면, 내가 무용지물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요즘은 이렇게 지내고 있다. 약이 더 나를 힘들게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를 돌봐주면서 다시 병원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라나지 않는 난포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