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소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돌이 Aug 05. 2021

성취감을 얻기 위해 양배추를 다듬었다

일요일 저녁. 


저녁은 일찍 차려 먹고 치웠고, 쓰레기 정리까지 말끔하게 마무리했다. 남편은 피곤했었는지 소파에서 곤히 저녁잠에 들어 있었다. 고양이들도 각자 자리에서 꾸물꾸물 졸고 있었다. 


월요일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 주말에 딱히 한 게 없다고 여겨져서 일까. 고요한 집안에서 혼자 울적함이라는 파도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 울적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한다!라고 내 이성이 소리치는 것 같았다. 뭘 하지?? 공부? 자기 계발? 책 읽기?? 아냐, 뭔가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필요해!라는 것이 결론. (다른 것들이 다 하기 싫기도 했다.)


그래서 내 손에 들린 것은 어제 잘 갈아둔 칼 한 자루와 땐땐한 양배추 한 통.



한 장 한 장 뜯어서 식초 두 방울을 떨어뜨린  물에 담가 두었다가, 흐르는 물에 씻기를 두 번 정도 했다. 크고 튼튼한 잎들은 쪄먹을 용도로 더 썰지 않고 두었다. 잎이 원래부터 작고 부드러운 것들은 샐러드나 롤, 샌드위치에 날 것으로 활용하려고 작게 손으로 찢어서 지퍼백에 넣었다. 나머지는 볶음 등의 요리에 써먹도록 약간 도톰하게 채 썰어서 지퍼백에 넣었다. 


용도에 따라 세 봉지로 정리된 양배추들을 보자 뿌듯하기도 하면서 헛웃음이 났다. 물론 다음에 요리할 때 양배추가 딱 준비된 채로 있으면 너무 간편하고, 몸에 좋은 식재료를 준비해서 건강한 식단을 짤 수 있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양배추를 다듬는 일을 한 것이라 생각하니 씁쓸했다. 

그래도 오늘 생산적인 일을 했다! 나의 쓸모를 증명했어!! 


내 '직장인'이라는 자아가 별 볼일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주부', '임산부' 등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역할에 자꾸 기웃대게 된다. 직장인인 나에게 불만이면, 직장인으로서의 레벨 업을 위해 공부를 하든 사람들을 쫓아다니든 해야 할 텐데, 그 고된 길은 가기 싫은 심보다. 아니, 그래서 상황을 타개하고자 이직을 희망해보지만 그 또한 여의치가 않다. 




지난주에는 급여 인상 소식이 들려왔다. 팀장님께서 해주시는 설명을 듣고 난 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나왔는데, 연봉제 대상자와 연봉 인상률이 다르게 적용된다고 착각했다. 그러자 성과와 관계없이 연봉제 대상자라는 이유만으로 더 높은 인상률을 가져간다는 것에 화가 났다. 친하게 지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봉제이다 보니 호봉제인 나와 직접적으로 비교가 되면서 더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쁘고 우울해진 이유는 급여, 인상률, 그 금액 자체가 아니었다. 그 사실로 인해 내가 '별로 쓸모없다'라고 평가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내내 그 사실로 혼자 괴로워하며 울적함 속에서 헤매다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팀장님 통화 내용이 들리는 것을 들어보니 연봉제 대상자와 호봉제 대상자 모두 인상률은 동일한 구조였다. 그때 깨달았다. 나 혼자서 자격지심에 착각하고 괴로움에 떨었다는 것을.


정말 어리석다!!!


나의 쓸모, 나의 생산성, 나의 회사에 대한 기여도 등등에 너무 집착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긍정적인 방향으로는 작용하지 못하고 한없이 나를 깎아내리는 데에만 쓰이는 것 같다. 




그래도 내가 곧잘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자각은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관련해서 책도 읽고, 영상도 보면서 '아, 나와 같은 생각 습관을 가진 사람들도 있구나. 나만 비정상적인 건 아니었어.',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자신과 화해하고 살고 있구나.' 하는 정보와 위안을 얻기도 한다. 필요한 것은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들 때 바로 나를 건져 올려낼 수 있는 실행력, 대처방법 등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일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양배추를 썰면서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내 야무진 양배추들은 요긴하게 쓰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