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저녁은 일찍 차려 먹고 치웠고, 쓰레기 정리까지 말끔하게 마무리했다. 남편은 피곤했었는지 소파에서 곤히 저녁잠에 들어 있었다. 고양이들도 각자 자리에서 꾸물꾸물 졸고 있었다.
월요일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 주말에 딱히 한 게 없다고 여겨져서 일까. 고요한 집안에서 혼자 울적함이라는 파도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 울적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한다!라고 내 이성이 소리치는 것 같았다. 뭘 하지?? 공부? 자기 계발? 책 읽기?? 아냐, 뭔가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필요해!라는 것이 결론. (다른 것들이 다 하기 싫기도 했다.)
그래서 내 손에 들린 것은 어제 잘 갈아둔 칼 한 자루와 땐땐한 양배추 한 통.
한 장 한 장 뜯어서 식초 두 방울을 떨어뜨린 물에 담가 두었다가, 흐르는 물에 씻기를 두 번 정도 했다. 크고 튼튼한 잎들은 쪄먹을 용도로 더 썰지 않고 두었다. 잎이 원래부터 작고 부드러운 것들은 샐러드나 롤, 샌드위치에 날 것으로 활용하려고 작게 손으로 찢어서 지퍼백에 넣었다. 나머지는 볶음 등의 요리에 써먹도록 약간 도톰하게 채 썰어서 지퍼백에 넣었다.
용도에 따라 세 봉지로 정리된 양배추들을 보자 뿌듯하기도 하면서 헛웃음이 났다. 물론 다음에 요리할 때 양배추가 딱 준비된 채로 있으면 너무 간편하고, 몸에 좋은 식재료를 준비해서 건강한 식단을 짤 수 있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양배추를 다듬는 일을 한 것이라 생각하니 씁쓸했다.
그래도 오늘 생산적인 일을 했다! 나의 쓸모를 증명했어!!
내 '직장인'이라는 자아가 별 볼일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주부', '임산부' 등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역할에 자꾸 기웃대게 된다. 직장인인 나에게 불만이면, 직장인으로서의 레벨 업을 위해 공부를 하든 사람들을 쫓아다니든 해야 할 텐데, 그 고된 길은 가기 싫은 심보다. 아니, 그래서 상황을 타개하고자 이직을 희망해보지만 그 또한 여의치가 않다.
지난주에는 급여 인상 소식이 들려왔다. 팀장님께서 해주시는 설명을 듣고 난 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나왔는데, 연봉제 대상자와 연봉 인상률이 다르게 적용된다고 착각했다. 그러자 성과와 관계없이 연봉제 대상자라는 이유만으로 더 높은 인상률을 가져간다는 것에 화가 났다. 친하게 지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봉제이다 보니 호봉제인 나와 직접적으로 비교가 되면서 더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쁘고 우울해진 이유는 급여, 인상률, 그 금액 자체가 아니었다. 그 사실로 인해 내가 '별로 쓸모없다'라고 평가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내내 그 사실로 혼자 괴로워하며 울적함 속에서 헤매다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팀장님 통화 내용이 들리는 것을 들어보니 연봉제 대상자와 호봉제 대상자 모두 인상률은 동일한 구조였다. 그때 깨달았다. 나 혼자서 자격지심에 착각하고 괴로움에 떨었다는 것을.
정말 어리석다!!!
나의 쓸모, 나의 생산성, 나의 회사에 대한 기여도 등등에 너무 집착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긍정적인 방향으로는 작용하지 못하고 한없이 나를 깎아내리는 데에만 쓰이는 것 같다.
그래도 내가 곧잘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자각은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관련해서 책도 읽고, 영상도 보면서 '아, 나와 같은 생각 습관을 가진 사람들도 있구나. 나만 비정상적인 건 아니었어.',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자신과 화해하고 살고 있구나.' 하는 정보와 위안을 얻기도 한다. 필요한 것은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들 때 바로 나를 건져 올려낼 수 있는 실행력, 대처방법 등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일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양배추를 썰면서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내 야무진 양배추들은 요긴하게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