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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Jun 03. 2021

그날 아버지의 등은 따뜻했다

기억 조각


그날은 추석 전날, 그러니까 작은 추석이었다. 우리가 당시 세 들어 살던 집은 대문을 열면 바로 주인집이 보이고 그 옆으로 좁은 길을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있는 구석 집이었다.  대문을 나서면 양옆으로 한쪽은 텃밭, 한쪽은 잡초가 무성한 황양한 불모지였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밖에서 동네 친구들과 노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엄마는 명절 음식 장만에 분주했고 아버지는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에 방에 가만히 앉아 계셨었다.

실컷 밖에서 뛰어놀다가 몸이 너무 뜨겁고 열이 나서 집으로 돌아간 나는 울상을 지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엄마 내 몸이 이상타. 막 머리가 뜨겁고 몸도 뜨겁데이"

그런 내 말에 엄마는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며

"머꼬? 야 와이라노. n이 아부지 여와서 야좀 보소. 몸이 불덩이라예."

내 몸에 손을 대보시던 아버지는,

"허허이. 봐라. 야 퍼뜩 병원가야긋다. 가만두면 큰일나겠꾸마."

엄마는 음식 만드는 걸 멈추시고 아버지는 옷을 갈아입으시고, 나를 들쳐업고 집을 나섰다.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병원 방문이다.




그날 의사 선생님은 나를 앞에 앉혀놓고 입 안을 검사하고 열을 재고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꼼꼼히 나를 살피셨다.

아직도 가장 선명한 기억은, 너무나 차갑고 서늘해서 온몸이 쭈뼛 소름이 돋았던 금속기계, 청진기다.

그날의 하늘은 파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새파랬고, 아버지의 등은 참 넓고도 따뜻했었다. 그런 아버지 옆을 나란히 걸으며 걱정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엄마, 엄마.

병원에 대한 사진 같은 기억보다, 푸근했던 아버지의 등과 그런 아버지와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걷던 엄마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훨씬 깊고 깊게 남아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살아온 날들을 통틀어도 몇 개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기억들은 옅은 회색빛이기 일쑤고 뭉게구름처럼 뭉쳐지고 포개져 이날이 그날이다 라고 딱 말하기도 애매한 수준이다. 일찍 돌아가신 것도 있지만, 같이 산 날 조차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날이 내겐 반짝반짝 빛나고 정겹고 행복하고 몽실몽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엄마가 돌아가시기까지의 기억장은 차고 넘치지만, 아버지와 엄마가 함께하는 모습을 본 것 중에서는 이 일화가 가장 말랑말랑한 호빵처럼 따뜻하다. 나는 아팠지만, 나도 엄마도 아버지도 그날만은 행복했기, 아니 행복해 보였다고 내 기억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엄마와 아버지가 웃으며 걷는 모습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행복이었든 듯싶다.

바람이 초록을 불러들이고 하늘이 하양 구름을 싣고 어딘가로 흘러갈 때면, 종종 그날이 생각난다. 고통과 아픔으로 수없이 많은 날을 채웠다 하더라도 채워갈 거라 하더라도 그래도 웃을 수 있는 추억의 냄새, 솜사탕처럼 폭신하고 달콤한 그날 같은 맛이 떠오르면 입안에 침이 돌고 입맛이 당긴다. 하얀 도화지에 빽빽하게 아픔의 색깔만 가득 칠해진다 하더라도, 어딘가는 꼭 빈틈이 있게 마련. 그 빈자리 사이사이에 그날 같은 추억을 그려 넣을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아마도 이날이 사진으로 각인된 것일 뿐, 이전에도 아버지는 나를 수없이 많이 업어주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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