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조병화 / 이어령 詩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많은 것에 초연해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나는 점점 더 부러운 것들이 많아졌다.
아마도 살아오면서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들이 미련과 후회 덩어리로 남아서 멍한 눈으로 멍한 마음으로 아주 오랫동안 타인들을 바라보게 되는 지도.
이따금 지인들은 묻곤 한다. 외롭지 않냐고.
외로움 따위 이미 세포 하나하나마다 내밀하고도 찐득하게 붙어서 공생관계된 지 오래야.
그렇게 대답하고 돌아서서 가만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가 한 번씩 자신에게 되묻곤 한다.
고독하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조병화
아주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곳은 마당이 운동장처럼 넓었다.
고 생각 했는데 그것이 기억의 오류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아주 어린 시절 나는 집 근처 연못인지 호수 인지에서 수영을 하며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었다.
고 생각 했는데 그 기억의 방이 와르르 무너졌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우리 집 마당은 넓지도 않았고, 나는 수영도 할 줄 몰랐다.
지금도 수영을 잘했던 기억은 미스터리다.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언니와 수영장을 갔었다.
나는 당연히? 수영에 자신이 있었으므로 위풍당당히 물속에 뛰어들었다.
아 개헤엄조차도 치지 못하던 내 모습이라니!
어린 날의 눈에 비친 세상은 넓고도 컸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이 작아지는 마법일까.
고독이란 뭘까. 외로울孤에 홀로獨. 한자와 뜻을 보니 그야말로 고독하다.
아직 소망과 삶과 그리움과 너를 가지고 있는 나는 그래서 고독한 걸까.
정말 그럴 때가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있더라. 창문 없는 사방의 벽에 갇힌 듯한 느낌.
외딴섬에 홀로 뚝 떨궈진 느낌. 노엽고 외로운 '혼자'라는 때 말이다.
그럴 때 나도 내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서걱서걱 글 한 줄 써볼까. 사소함을 꺼내어 소소함을 담아.
살면서 누구나 만나지는 혼자라고 느껴질 때.
오늘 같이 살랑이는 환절기에 시그널도 없이 훅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니 유비무환 하자.
미리 잘 깎은 나무냄새 좋은 연필도 준비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