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시름 시름 골골한 소리를 내더니 밤이 오면 갓 태어난 아기처럼 우렁찬 소리를 질러대는 귀뚜라미 소리.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뒷 베란다에도 산이 눈 맞춤하는 앞 베란다에도 귀뚜라미 소리는 영역을 침범한 줄도 모르고 거침이 없다.
무언가 따라오는 듯한 느낌에 설핏 뒤돌아보면 내 그림자 위로 언제인지도 모르게 떨어져 앉은 노란 잎사귀. 무화과나무는 붉고 푸른 자태로 자신을 뽐냈지만 어느샌가 아무도 봐주지 않는 설움에 겨웠는지 땅에다 자신을 묻고 있다.
개중에 유달리 부지런한 나무들은 앞서 잎들을 물들이고 미리 잎들과 작별을 고했다. 온몸 촘촘히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서두른다.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빠르기도 하여라.
분주히 계절을 살고 쉼을 준비하는 나무는.
다 내어주고 내려놓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나무는.
삶의 구간 구간마다 쉴 자리 하나씩 있어서 좋겠다.
겨울의 맹렬한 추위와 싸워야 하지만 속으로는 바쁘게 초록을 비축하고 있을 나무들처럼, 혹은 긴 잠을 준비하는 동물들처럼 나도 깨워도 깨지 않을 것 같은 깊고 단 겨울 잠 실컷 잤으면 좋겠다. 그리고 산뜻하고 경쾌한 기분으로 언제 잤냐는 듯이 기지개 켜고 새롭게 봄 같은 삶을 맞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9월의 가을 날 오후 3시. 낮의 정점에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빛의 자국처럼 못내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해가 머뭇대고 있다.
가을 날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판에 바람을 놓아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십시오.
그들을 재촉하여 더욱 무르익게 하시고
마지막 남은 단맛이 포도송이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자는 이제 집을 짓지 못합니다.
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래오래 고독할 것이며
밤을 밝혀 책을 읽으며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안에 잠기면 가로수 사이를 헤맬 것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릴 적에.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김범수의 '하루'라는 노래가 카페 안을 정처 없이 채우고 있었다.
사랑이 날 또 아프게 해요... 사랑이 날 또 울게 하네요...
커피 한 잔도 없이 투명한 물 잔을 앞에 놓고 테이블만큼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잠시였는지 오래였는지 모를 침묵의 시간.
어떤 말도 언어가 되지 못한 채 입안을 맴돌았고 그렇게 말 대신 등을 보이고 그 사람은 떠났다.
9월의 쓸쓸했던 날. 계절은 막 가을로 치닫고 있었는데 우리는 끝끝내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여름과 작별하듯 무심하게.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또다시 9월은 왔다. 그렇게 왔다가 갔다가 수 해의 9월을 보낸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