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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May 12. 2021

<아무도 모르는 기적>  김주영

책이 있는 공간

아무도 모르는 기적




하루 종일 볕이 잘 드는 산골마을인 두들마을. 

그곳에 사는 8살 준호는 장날에 아버지 박호창을 따라 생애 처음으로 마을 밖을 나가 장구경을 가게 된다. 

낡은 트럭 뒤 적재함에 장날을 나가는 짐들과 사람들 사이에 얹혀서 폴폴 날리는 먼지를 동무 삼아 장마당에 도착한다. 장에서 아버지는 준호에게 새 고무신을 사주고, 준호는 신발가게 주변에서 온갖 장사치들의 군상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준호가 그 신발가게를 벗어나지 않고 얼쩡거리는 이유는 얼추 엄마 발에 맞아 보이는 고무신이 그 가게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해를 먹고 흘러 어스름이 내릴 즈음, 신발가게 주인이 조는 틈을 타, 준호는 계속 눈여겨보았던 고무신 한 켤레를 냉큼 들고, 장마당 골목을 도망치듯 달린다. 그러다 무심코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사준 신발을 지금 들고 나온 엄마 신발 대신 두고 오려했던 걸 까먹은 것이 생각났다. 거기다가 아버지도 잃어버렸다. 준호는 갑자기 두려워져서 눈물이 마구 흘렀다.  

신발가게로 다시 가보니, 이미 흔적도 없이 가게는 없어져 버렸다. 신발 두 켤레를 가슴에 꼭 껴안고, 아버지를 찾아 대장간도 가보았으나 아버지는 없었다. 시간은 이제 어둠을 먹고 있었고, 한기가 들어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텅 빈 장마당에는 준호만 덩그러니 서있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서있다가, 마침 뒷집에 사는 이웃사촌인 삼복이 삼촌을 만난다. 삼복이 삼촌이, 아침에 타고 나왔던 그 삐걱대던 트럭에 준호를 태워주면서 아버지와 나는 새벽에 길동무 삼아 황장재를 넘어 집에 갈 것이니 걱정 말고 먼저 가라고 한다.

그 트럭에는 다음 장터로 이동하는 장사치들과 장을 다녀가는 장꾼, 그리고 짐들이 가득 적재되어 있었다. 준호는 그 짐들 사이에 접히듯 꼬불쳐져 집으로 향하게 된다.





참나무, 소나무, 아까시나무 등 온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좁은 길을 트럭은 달린다. 황장재 고갯마루를 힘겹게 오르던 트럭은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인 고갯길 정상에서 갑자기 우뚝 멈춘다. 그 이유인 즉슨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고, 트럭과 마주 보고 앉은 채 도무지 비켜주질 않았기 때문이다. 트럭에 탄 이들은 일촉즉발의 위험을 감지하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러던 중 말끔하게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 있던, 장사치 같지 않던 사람이 입을 뗀다.

저 호랑이, 산신령이 우리를 다잡아 먹지는 않을 것이다. 호랑이한테 잡아먹힐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

원하는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옷을 던져주어 그 옷을 물고 놓지 않는 그 사람을 내려놓고 가자. 

그 말에 생선 장수가 노름판 타짜꾼이 제일 먼저 옷을 던져야 한다고 얘기하고, 모두가 그렇다 하니, 타짜꾼이 웃옷을 벗어 호랑이 앞에 던졌다. 타짜꾼은 옷을 던지면서 다음에 옷을 던질 순서를 본인이 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호랑이는 타짜꾼의 옷을 물어 멀리 길섶에 던져버린다. 그 모습을 보고 말쑥한 양복 차림의 사내는 타짜꾼이 영험하다며 그에게 자신의 옷도 던져줄 것을 요구하고, 타짜꾼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며 지갑을 통째로 달라고 한다. 그러자 양복의 사내는 지갑을 내놓고 윗도리를 벗어 건넸고, 타짜꾼이 그 옷을 던지니, 호랑이는 이번에도 옷을 길섶 쪽으로 던져버린다. 

이윽고 다른 승객들도 본인의 옷을 던져달라며 가진 돈을 다 내놓는다. 호랑이는 던지는 옷 모두를 길섶으로 던져버린다. 운전기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옷을 던졌지만, 호랑이는 옷을 모두 길섶에 던진 후 여전히 그 자리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있는다. 

운전기사는 옷을 던질 수 없다. 운전기사가 없으면, 이 트럭은 움직일 수 없으므로.

그러다 짐짝 안에 웅크리고 있던 준호에게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갔고, 그 아이의 옷도 던져야 한다고 말끔한 신사가 말하자 모두 동의하고 막무가내로 울고 있는 준호의 웃옷을 벗겨 호랑이 앞에 던져버린다. 그러자 호랑이는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옷을 물고 놓지 않는다. 트럭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한치의 주저함 없이 준호를 차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트럭은 호랑이가 비켜준 그 길을 따라 고갯길 내리막을 새 차처럼 신나게 달리며 줄행랑쳐버린다.

호랑이는 웃옷도 없이 울고 있는 준호를 확인하고는 안개 깊은 숲 속 저멀리로 사라져 버린다. 준호는 무서움과 두려움에 가슴에 꼭 안고 있던 고무신 두 켤레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 채 울면서 트럭이 지나갔던 그 길을 따라 냅다 달린다. 그렇게 우여곡절끝에 두들마을에 도착한 준호. 한길까지 나와서 준호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와, 누렁이와 조우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한편 아버지 박호창과 삼복이 삼촌은 장마당 선술집에서 거나하게 술을 걸친 후 새벽쯤에야 황장재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러다 고갯길 정상에 올라서자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다. 둘러보니 낭떠러지 밑이 울긋불긋하다. 자세히 가서 보니 트럭이 추락하여, 온갖 짐들과 사람들 모두가 한 사람도 산 사람 없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준호가 없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 박호창 씨는 혼비백산하고, 두들마을에 그 사실을 알리러 먼저 갔던 삼복이 삼촌에 의해 준호가 집으로 무사히 돌아와 있는 것을 알고는 안심한다. 

그리고 준호가 잃어버렸던 새 고무신 두 켤레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 사이 가지런히 집에 와있었다.









" 당신네들이 작당하여 나를 저 호랑이 아가리에 집어넣을 작정이겠지? 당신들 호들갑 떨고 있는 속셈을 난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여? 나를 비롯해서 당신들 모두가 순진한 백성들 사기 쳐서 먹고살기는 매한가지야. 잘난 체하고 변죽을 떨고 있는 넥타이 맨 저 사람도, 썩은 생선 팔고 있는 저 사람도, 멀쩡한 이빨을 썩었다고 거짓말하고 주머니 발기고 있는 돌팔이 발치사도, 북 치고 장구 치며 가짜 약 팔고 있는 약장수도, 원가보다 몇십 배를 불려 폭리를 취하는 신발 장수도, 억울한 백성들 주머니 발라서 배를 불리기는 다 마찬가지야. 물론 나 역시 호랑이 아가리에 대가리 디밀기 전에 돌로 쳐 죽여도 마땅한 놈이야. 그러니 당신네들 제발 잘난 척 좀 하지 마. 당신네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어? 그 모두가 오십보백보야. 거기서 거기란 말이야. 넥타이 했다고 뽐내지도 말고 나처럼 남루하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어. 모두가 못난 놈이고 사기꾼인 건 마찬가지란 말이야. 할 말 있으면 어디 한번 낯짝들 쳐들고 말해봐."

- 본문 중에서 -






짧은 소설인 이 '아무도 모르는 기적'은 김주영이 팔순이 된 2018년에 펴낸 신작이다. 마치 전래동화 같은 소설, 짧지만 강렬하다. 권선징악, 사필귀정 같은 고사 성어가 어울리는 소설이다.


이 동화 같은 소설을 읽고 나서 불쑥 떠오른 생각은, 이다. 세상을 살면서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때. 자신도 모르게 떼어내도 떼어지지 않는 때들 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군상들은, 돌팔이 발치사, 야바위꾼, 생선 장수, 노름판 타짜꾼, 신발 장수, 바람잡이 약장수 등 세상의 때가 잔뜩 묻은 어른들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비정함을 가졌고, 서로 적이었다가도 필요에 의해서는 금방 동지도 될 수 있는 속물근성을 가진 어른. 설령 지켜주어야 할 존재라 할지라도 자신이 내몰리는 상황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때 묻은 어른.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 무궁한 때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은 아닐까.


이 동화 같은 소설은 허울 좋은 말로 자신의 잇속을 차리는 데만 밝은,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때 묻은 어른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병폐 들을 드러내는 반면, 그 어른들과 대조되는 순박하고 해맑은 준호라는 아이를 등장시켜 어른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경고의 뭇매를 날린다. 

결국 온갖 것의 덩어리의 결정체인 트럭과 트럭에 탄 사람들은 벌을 받고, 착한 마음을 가진 준호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권선징악을 완성하게 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소설은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모두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호랑이는 그 때묻은 어른이란 존재들 사이의 순수한 영혼인 준호를 지켜내기 위해 등장한 존재이다. 8살, 아직 학교가 너무 멀어 가보지 않았고, 두들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아이지만, 엄마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 그 아이의 눈에 보인 욕망에 가득 찬 어른들의 세상은 호랑이의 존재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준호를 지켜내고 신발을 지켜낸 호랑이라는 존재는 비정한 세상에서 누군가 호랑이 같은 존재가 세상을 지켜주길 바라는 데서 등장한 초월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김주영의 작품은 토속어나 방언 같은 언어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작품들이 많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많은 작품을 읽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작품 중에는 홍어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티브이 문학관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는데, 마치 수채화 같던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오랜만에 김주영 작품을 읽게 되어 반가웠다. 예전에 읽었던 작품들도 다시 읽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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