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한 게이가 말한다.

"나 여기 있어요. "

by 혜성

나의 지인 중에 대학생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는 친구가 있다. 그와의 대화는 대부분 그의 학생들과 일어난 에피소드인데, 그들의 무지에 미간을 찡그리거나 황당무계한 발상에 재미있는 사건이 많아서 흥미진진하다. 물론 그의 성적 지향성은 게이이지만, 일반적으로 봤을 때 그의 정체성을 알아맞출 일반인은 거의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그의 평소 차림은 원색으로 채워져 있는데, 노란색, 빨간색과 진한 파란색이 주를 이룬다. 물론, 직장에 갈 땐 무채색이나 짙은 푸른색 셔츠를 고수하는 편이다. 게다가 살짝 기른 수염은 아직도 앳된 그의 얼굴을 가려 꽤 남성미를 풍기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이 않는다면 패션센스가 좀 있는 멋쟁이 일반 남자로 보일 것이다.


한 번은 그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와서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 기직 전, 그는 나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말하는 걸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한참 이야기하다 내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죄책감에 입술을 꼭 닫고 묻곤 했다. 나는 듣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기도 해서 걱정 말라고 어깨를 슬쩍 들어 올려 주었다. 듣는 것도 에너지를 꽤 소모하는 일이다. 적절한 공감 그리고 집중하고 있다는 제스처들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정확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쁜 놈이네, 그놈’을 외쳐서 나는 전적으로 당신의 편임을 인지시켜줘야 더 긴장감 있는 입담을 들을 수 있다. 안 그러면 자기의 부정적인 감정을 변호하거나 자기 합리화에 애쓰면서 김이 샐 확률이 높다.


한 번은 ‘Ted Talk’이라는 미국의 비영리단체에서 하는 강의를 듣는데,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가끔 스피킹과 리스닝을 목적으로 수업이 진행될 때가 있다고 했다. 특히 중급자와 상급자 사이에 있는 학생들에게 효과적이라고 한다. 한 번은 비만인 미국인 여성이 미국 사회의 비만녀로 살면서 느낀 편견에 관한 강의를 시청했던 날이었다. 그 주제는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에 맞춘 외모지상주의와 그에 따른 차별에 관해서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는 자리였다.


한 남학생은 그가 꽤 많은 영어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그의 생각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선 그런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뚱뚱한 사람이나 장애인과 여성들은 한국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그의 영어에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친구는 이 말을 듣고 그의 성향을 먼저 파악할 수 있었고, 그의 영어실력에 칭찬하기에 앞서, 선생님이라는 직업의 소명으로 그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 싶었다고 그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이 그 학생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말해줬다. ‘내가 바라본 세상은 조금 다른데, 혹시 장애인은 다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봤어?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면 한국 여성들은 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것일까? 혹시 동성연애자(Gay)들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니?’ 학생들은 그의 긴 영어를 제대로 못 알아들었는지 입을 꾹 닫고 눈알을 위로 올려 그가 이야기한 단어들을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유독 ‘Gay’라는 단어에는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보였다고 했다. ‘한국엔 게이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맨 뒷자리에 앉은 남학생은 거만한 표정을 짓고서 선생님이 이야기한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문제는 쏙 빼놓고 이야기했다. 대답을 마친 그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자신의 노트를 끄적이는 척했다.



‘그는 20년간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내 머릿속에서 처음 떠오른 질문이었다. 나의 존재가 부정된다거나 혹은 내가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보다도 내 등 줄기를 서늘하게 만든 것은 다른 어떤 것이었다. 무엇이 그들로부터 현실을 분리시켜 놓은 걸까 그 원인을 찾고 싶었다. 한국의 교육과정은 이들에게 뭘 가르치고 있는 걸까? 만약 이들 중에 게이와 레즈비언이라는 성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침대 아래, 바닥 한 구석, 팔이 닿지 않아 먼지를 닦지 못하는 것과 같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에 나와 대부분이 말하는 성공적인 삶으로 향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타자(장애인, LGBTQ, 페미니스트 등)를 지지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일방적으로 내가 맞다고 주장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완벽하다는 민족주의적 사상에 갇혀, 한국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소리를 막고 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는 그 어떤 것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기에 나는 이 문제에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집단이 편견으로 인한 불편함을 호소한다면 먼저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의 20대의 친구들은 후에 사회에 나가 한국이라는 국가의 성분을 이룰 것이며, 이미지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친구들에게 나는 어떤 한국을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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