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게이 에세이] 내 생각들.

by 혜성

오늘은 애인의 집에서 잤다. 그가 10시에 비즈니스 미팅이 있어서 서둘러 그와 커피를 마시고 9시 30분에 내 집으로 향했다. 내 안을 감싸던 따뜻한 온기는 겨울바람이 가져가 버렸고, 햇살빛 길고양이가 잔디밭에 꽈리를 틀고 앉아 나를 가만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의 집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고양이이다. 이름은 까먹었는데, 누군가 근처에서 밥을 챙겨주는지 살이 포동포동하게 쪄서 이 근처를 맴돈다.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는 다른 고양이와는 다르게 상당히 경계하는 성격이고, 일정 거리 이상을 접근하면 도망가 버리는 녀석이다.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 걸까 문득 궁금증이 인다. 그는 내가 걷는 방향으로 계속 고개를 돌려 경계를 하면서도 따뜻한 햇빛을 받아 나른한지 눈을 끔뻑끔뻑하고 있었다.


나는 옷 깃을 여물고 집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좀 움직이다 보면 추운 것도 사라지겠지. 모두가 출근을 마쳤는지 길가엔 성애가 낀 낙엽들과 아직 녹지 못한 검게 물든 눈덩이가 그림자 아래 남겨져 있다. 빈 속에 커피를 마셨더니 속이 좀 쓰리다. 집까지 가는 길가에 음식점이 있었나 머릿속으로 훑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서 바로 포기한다.


순간 아침에 샤워를 마치고, 벌거벗은 채로 나온 내 몸을 유심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지난 한 달 동안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상체가 근육이 조금 붙어서 가슴과 배에 얇은 굴곡이 그림자 져 있었다. 그의 도발적인 시선에 기분이 좋아져 옷장을 열곤 어떤 속옷을 입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는 만들고 있던 커피를 두고 뒤에서 나를 안아 등에 입술을 얹는다.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한 손으론 내 엉덩이를 만지며 말했다. “왜 이렇게 부드러워?” 나는 방금 그걸 알아챘다는 듯이 내 엉덩이를 만져봤다. “그렇지? 요즘 운동을 자주 했더니, 근육도 좀 붙고 피부도 부드러워졌어.” 말을 하고 나니 내가 좀 자만했나 싶었지만, 그건 자신감이었다고 스스로를 정정하며, 몇 벌 안 되는 내 속옷들 사이에 하나를 집어서 입었다.


난 집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다가 들렸어야 할 인쇄소를 한참 전에 지나쳤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어서 포기한다. ‘우리가 벌써 이 년이 되어가네.’ 나는 재작년 유월,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시간이 참 빠르다고 생각했다. 우린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고, 섹스도 자주 하며, 각자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고 있다. 난 희미한 공기의 떨림이 묘하게 내 신경을 건드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도 나만큼 날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 차가운 떨림은 내 코를 타고 들어가 뜨겁게 달궈져 내입을 통해 곤두박질쳤다. 나만 그리워하면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평생 내 옆에 항상 있는 건 싫다. 나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없으니 세상 모든 것들이 내 눈과 코와 귀를 자극하고 있다. 그와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만의 새로운 차원 속에 있는 기분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서 걷는 게 좋다. 내 안에 내가 어떤 감정이고 어떤 말을 하는지 듣는 소중한 시간이다. 하지만 내가 옆에 항상 그와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앞에 아주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엉기적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녀의 비니는 어두운 보라색과 회색이 마구 뒤섞여 있어서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군데군데 박힌 큐빅은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고 밑으로 곱슬머리가 마구 삐져나와 있었다. 근처 마트에서 급하게 뭘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김치전이 먹고 싶어 졌다. 가는 길에 마트에서 오징어 한 마리를 사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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