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SF 장르의 소설 디스토피아적인 미국의 근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AI 로봇의 노동력으로 인간들은 설 자리가 없어서 길거리로 나와 시위하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들 간의 갈등은 심화됐습니다. 과도한 미국의 공장식 생산으로 환경오염 문제 또한 심각합니다. 작가가 투영하고 있는 세계는 현재의 환경문제와 과학기술에 기초하기 때문에 현실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주인공 클라라는 인공지능 로봇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막 세상에 나와서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 서툰 어린아이처럼 보입니다. 그녀의 사고패턴은 굉장히 직관적이고 사소한 정보 하나 놓치지 않습니다. 주인의 눈 찌푸림, 입술의 떨림과 맥박과 제스처를 수집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난 원인을 찾아내서, 그 원인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의 행동을 제한합니다. 또, 클라라는 자신의 입장에서 어떤 사건을 해석합니다. '쓰러져 있던 노숙자가 햇빛을 받으니까 일어나서 움직인다.'라는 시각적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이 '나는 태양열로 에너지를 충전하여 움직인다.'와 연결시켜 '인간도 태양에서 에너지를 얻는다.'라는 결론을 짓습니다. 설령 노숙자는 그냥 길거리에서 자고 있었는데, 햇빛이 너무 강하게 내리쬐어서 다른 데로 옮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햇빛을 받으면 비타민과 활력을 얻으므로 완전히 틀린 정보는 아니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심한 환경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미세먼지'일 것입니다. 숲이 사라지고 사막화가 진행은 가속화되며 화석연료로 매연가스는 심각한 상태입니다. 세계 곳곳에선 기상기후가 발견되고 한국에선 여름에는 살인더위, 겨울에는 폭설이 내립니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님은 한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코로나에 대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지난 2월에 캠브릿지 대학 연구진이 연구한 논문이 나왔는데요. 지난 100년 동안 열대 박쥐들이 얼마나 온대 지방으로 이동했느냐를 놓고, 데이터를 전부 분석을 해 보니까. 온대 지방에 새로운 생물다양성 거점이 몇 곳 생겼다는 거예요. 그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데가 중국 남부, 거기로 지난 100년 동안 열대 박쥐 약 40종이 새로 유입이 됐다는 거예요. (...) 기후변화 때문에 온대지방의 기온이 올라가니까. 열대에 살던 아이들이 '어! 여기도 살 만하네?' 그래서 슬금슬금 옮겼다는 거죠. 열대에 가서 박쥐 한 마리 잡아서 코로나 검사를 해보면 대개 두 종류 세 종류 정도를 갖고 다니거든요. 그러니까, 지난 100년 동안 40종이 새로 들어왔다고 그러면, 40종 곱하기 2 아니면 3 그럼 대체로 한 80- 120, 대략 100종류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남부지역으로 들어왔다는 거죠. 그중에 어떤 것 하나가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현재 초기 코로나와 그 이후로 변이 하여 몇 년 동안 인간을 괴롭힌 이 바이러스는 환경 문제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최박사님의 의견입니다. 그리고 "신종 감염병의 주기가 계속 짧아지고 있다."라며 환경운동의 필요성을 다시금 되새겼습니다.
그녀의 무조건적인 헌신은 비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상화된 어머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 항상 내 옆에서 걱정해주고 위험에서 보호해주며 아플 때는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는 그런 어머니 말입니다. 그녀는 조시가 건강을 회복하길 간절히 바라며 태양에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녀와 릭의 '진실된 사랑(Genuine love)'를 언급하며 그녀가 살아야 할 이유를 태양에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진실된 사랑'은 클라라의 어머니 같은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라라는 조시의 위성처럼 그녀의 곁에 존재합니다. 그녀가 혹시 자신을 필요로 할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조시는 그런 클라라의 헌신을 당연시합니다. 우리가 태양은 항상 시간이 되면 떠있고, 거기에서 항상 비추는 따스함때문에 그 소중함을 매번 까먹듯이 말입니다.
제가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는 클라라가 왜 기도할 때 엄마의 사랑을 언급하지 않고 남자 친구인 릭의 진실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설 속의 조시의 엄마는 굉장히 합리적이면서 이중적인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자녀를 남들 못지않게 잘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 있고, 그 욕심 때문에 조시의 언니는 조시와 같은 병을 앓다가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며 조시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반쯤은 포기하며 회피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물론 그녀는 좋은 의도에서 한 행동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자식이 죽게 된다면 그 죄책감과 상실이 클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시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사회화를 명목으로 소셜클럽에 계속 참석하는 것을 보면 이해하가 안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클라라를 구매할 때, 조시는 클라라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엄마는 조시의 간절한 마음보단 실용성을 더 따지고 듭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 손을 잡고 가게에 가서 내 생일선물을 고르는데, 내가 원하는 소설책, 그림책, 게임기, 만화책 등 보다 부모님의 기준에서 그것이 실용적인지 혹은 그것으로 얻는 이득이 무엇인지를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진실한 사랑'을 하는 인물은 클라라라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태양처럼 따스하고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항상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큰 노력 없이'란, 좋은 성적을 받아오지 않아도, 실수를 하더라도,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 어떤 일을 눈치 보면서 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클라라는 조시를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깨끗한, 밝은’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클라라(Klara)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붙여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