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서 그린다는 것

이제는 크로키를 그릴 거야

by 유하


명절 연휴여서 화실을 못 갔다. 그래서 보충을 하기 위해 이 번주는 화실을 2번이나 방문했다.

화요일과 수요일, 연속으로 방문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보다 설렘이 가득했다.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화실을 가는 길은 신날 정도로. 그렇게 또 한 번 느낀다.


나는 정말 그림 그리는 게 좋구나.






확실히 비가 오지 않아서 그런지, 여유롭게 도착해서 10분 정도 더 일찍 화실로 들어갔다. 선생님과 인사한 후 내 자리로 자연스럽게 앉아 지난번에 마무리하지 못했던 자연물 스케치부터 마저 정리했다.


아보카도와 체리를 마저 수정하고, 크로와상을 먼저 그렸다. 엉성하게 그려져서 마음에 안 들기도 하지만 여기서 더 고쳐도 마음에 안 들걸 알아서 바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갔다.


마카롱을 그릴 때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시작했는데, 하나가 아닌 다수로 있을 때는 먼저 구조화를 시켜주는 게 좋다고 한다. 크게 기준선을 그리고 그 안에 또 기준선들을 쪼개서 넣고, 쪼개서 넣은 선 안에 하나씩 채워주면 된다고.


건조한 땅에 빠르게 물이 스며들듯,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선생님의 설명도 좋지만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는 연필의 스케치는 눈으로 저장하는 것만으로는 아쉽다.그럴 때면 나는 정말 이런 기초적인 걸 배우고 싶었구나,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놓쳤던 부분이 어떤 것인지, 그 놓쳤던 부분을 무엇으로 채워줘야 하는지. 이렇게 하나씩 배워가는 것 같다.





스케치가 끝난 후, 다음에는 물감으로 채색하듯 수채화나 오일파스텔을 추천해 주셨지만 계속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인물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인물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얼굴이나 손, 발처럼 세부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적인 실루엣을 잡을 수 있는 크로키라고 했다. 세부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구조화를 먼저 시키고 세부적인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인 실루엣을 잡을 수 있는 크로키를 먼저 하고 싶다고 했다.


역시나, 크로키도 그리는 게 쉽지 않았지만 정물보다는 훨씬 더 흥미로웠다. 뼈대를 먼저 그리고 근육과 살을 표현하고 그 위에 옷을 그리고, 하나씩 해나가는 그 과정은 앞에서 그렸던 그림에 비해 시간이 배가 걸렸지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선을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리는 연필 선으로 이런 느낌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밌어서 이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오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해서 당신이 그림 그릴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원래 하던 일과 이별하지 못해서 몇 년은 더 방황하고 고민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변하기 위해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 / 반지수



나는 결국 돌고 돌아서 그림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퇴사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상황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정말 살아있구나라는 걸 느끼게 되는 건 지금 이렇게 몰입하고 있는 시간이다.


물론 나 역시 어려서부터 꾸준히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을 다시 시작한다는 건 늦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늦었으니 안 하는 게 맞다고. 그래서 계속 시작을 망설이고 또 망설였었는데, 지금 이렇게 선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걸 보면, 나는 결국 지금이 아니어도 시작했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더 힘내서 그려야지. 일단 그림을 그리면, 또 다른 무언가 열릴 거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만의 방법으로 그린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