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사람, 괜찮은 사랑
애인은 요즘 내게 “사람 됐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마치 돌아온 탕아가 번듯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눈물짓는 부모님처럼 말하지만,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구 사랑, 현 사랑 모두 나를 봐줬다. 나를 돌보아줬고 눈감아줬다. 가끔씩 지나간 애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 내가 저지른 말과 행동이 생각나면서 숙연해진다. 그 반성의 결과로 “사람 됐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미적지근한 밀고 당기기를 끝내고 ‘연인’으로 정확하게 관계를 정리한 후에는 절대 재지 않는다. 이 한 몸 불살라서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내던진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주변에서는 “진짜 사랑하나 보네.”라고 하거나 “작작해라.”라고 했다. 그런데도 연애는 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포장 도로를 달리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내는 기분이었다. 연애를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서 어쭙잖게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연애의 가장 큰 준비물은 나 자신이다. 마음이 안정된 나. 나란 사람이 속에 뭘 품고 다니는지도 모르면서 누군가를 만나면 나와 상대 모두를 상처 입힌다. 내가 다치는 것은 괜찮다. 부상당한 나를 부축해주는 것도 나이니까. 하지만 상대방은 이유 없이, 대책 없이 앓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나 자신보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나를 사랑한다면 나 자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사랑이 나의 전부라고 착각했다. 사랑을 1순위에 올려주었으니 그에 맞는 보답을 바라는 것은 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입맛대로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비수가 될 만한 말들만 골라서 내뱉고, 나를 챙기느라 상대의 삶은 늘 뒷전이었다. 개차반도 그보다는 나을 것이다.
한 날은 늘 그랬듯이 들쭉날쭉한 심정을 얘기하며 애인에게 상처될 만한 말을 했다. 커피를 휘휘 저으면서 얘기하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애인이 울고 있었다. 코도 훌쩍이지 않고 커다란 눈물방울만 뚝뚝 떨어뜨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무슨 짓을 한 거지.’와 ‘이 쓰레기야.’라는 소리로 가득했다. 나보다 나이 많고 연륜 있는 사람이 운다. 아니 그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이보다 못된 짓이 어디 있을까? 나는 그날 이후로 정신 차렸다. 정말이다. 최고로 노력하고 있다. 그게 당연하다.
금세 변하지는 못했다. 먼저 내가 변해야 했다.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도 못할 만큼 미성숙한 나를 앉혀서 화내고 다독였다. 나도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에 똑바로 자랄 수 없었다. 나를 제대로 마주하고 나니, 불쌍했다. 내가 나를 돌봐주지 않은 것에 화가 났다. 끝까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더 오래 지켜볼 것이다. 나는 나를 제일 사랑하니까.
애인에게서 요즘 제일 듣기 좋은 말은 인간 아니었는데 사람 됐다느니 그지 같은 성질 많이 죽었다느니 라고 얘기할 때이다. 나도 이제는 괜찮은 사람의 출발선에 선 기분이다. 까딱하면 부정 출발로 탈락하거나 뒤로 고꾸라져서 코가 깨지겠지만 내 목표는 이 트랙을 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괜찮은 사랑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