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편지 Sep 04. 2021

영원을 약속한다는 것

결핍을 채워주겠다는 말


 비혼을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결혼에 딸린 모든 제도에 엮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는 사랑의 지속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없다. 물론 사랑이 성애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오래된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어떤 오해 없이 나와 타인을 볼 수 있다는 것. 단단한 기반에서 오는 안정감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관계의 모양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절대 꺼지지 않는 열정을 지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나조차 사랑은 매번 끝이 났다. 미래를 약속하는 일이 당연했던 관계도 스리슬쩍 빛을 달리 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던 내가 과거가 되면 나도 상대방도 많이 변해있다. 여전히 사랑을 속삭여도 모양은 이미 달라져있다. 나는 영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약속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영원이 환상처럼 눈이 부시기 때문에 실현할 의지가 없는 것이다. 나는 늘 변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이런 나에게 제도로 사랑을 묶을 수 있다는 말은 터무니없이 들린다. 


 사랑에 빠지는 것에는 너무나 복잡한 마음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선택했다면 반드시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안정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다정한 사람이 필요하다. 전 애인의 집착에서 겨우 벗어났다면 적당히 거리를 두는 사람을 원한다. 그 사람의 외모와 성격이 나의 마음을 흔들려면 내가 겪어온 경험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 100%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사람을 만날 수는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욕망이 되고 상대방의 욕망과 맞아 들어갈 때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듯이, 나의 욕망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상대방을 아무리 사랑해도 나의 욕망이 뒤처지면 관계를 당기는 힘이 느슨해진다.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바꾸려고 하는 것은 내가 우선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욕망도 변한다. 매 순간 그렇다. 가정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을 원했지만 내 안에 해소되지 않는 결핍을 채워줄 사람을 만나면 사랑의 이름은 변한다. 나 자신으로 온전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사랑이 더는 필요하지 않다. 욕망도 결핍도 없기 때문에.


 한 사람을 오래 만날수록 그 사람의 가슴속 구멍을 깊이 보게 된다. 자신 외에는 누구도 채우지 못하며 바닥을 찾으려면 처음의 고통부터 다시 느껴야 하는 구멍 말이다. 내게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채우지 못한 구멍을 황망한 상태로 드러내며 서로를 본다. 사랑은 구멍 사이 어디쯤에서 겨우 숨 쉬고 있다. 나는 여전히 영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온전해지는 만큼 상대방도 그러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목표는 완주하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