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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도영 양지은 Aug 20. 2023

그 시절 나의 엄마에게

지은의 편지 5

도영 언니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가깝고도 먼 시간인지 체감하게 되는 요즘이야. 한 달의 반에 다다르는 시간 동안 우리의 감정은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내 들뜨기도 해. 어떤 날은 내 일상이 무너지고, 어떤 날은 언니의 평온이 무너지는 우리의 편지를 보면서 감정의 얄궂음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에도 다시 언니에게 안녕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지금이라 다행이라 생각해.


나는 요즘 우리 가족의 경사가 찾아온 날, 언니와 나눈 카톡을 보며 일상을 넘어선 기쁨을 되새기고 있어. 내가 이모가 되었다니. 엄마와 언니에게 받은 사진 속 아이는 갓 배에서 나와 잔뜩 움츠린 얼굴임에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어서 마음이 더 뭉클했어. 이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에게 없었던 작고 여린 생명이 찾아온 것이 놀라워. 나도 이런 마음인데 자매인 언니는 어떤 마음이 들지, 엄마인 도진 언니는 어떤 마음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할머니가 조금 더 건강하셨다면 우리 가족들은 할머니 집에 모여 증손주를 봤을 테고,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기뻐했겠지. 최근 몇 년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는 듯 눈물 흘리는 할머니를 자주 봤어.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보며 우시기도 하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투닥거리며 싸우는 엄마와 이모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도 우시기도 했지. 할머니는 지나간 세월과 앞으로의 시간을 가늠하고 계셨던 것 같아. 지난번 언니의 편지를 받고 생각했어. 한 여성이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증조할머니가 될 때까지의 시간 속에서 할머니 집에 남아있는 감정의 잔해들에 우리 가족이 많은 빚을 졌다고 말이야.



내게 할머니 집은 학창 시절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해. 서울에서 내려와 도피하듯 내맡겨진 할머니 집이었기에, 나는 좀처럼 그곳에 정을 붙이기 힘들었어. 방학이나 명절마다 들려 언니들과 뛰놀았던 바로 그 집인데 마치 다른 공간에 온 듯 이질감이 들곤 했지. 내게 할머니 집은 두 가지 모습이었어. 우리 가족이 모이는 할머니 집, 할머니와 내가 사는 집. 모든 가족이 모였다가 떠나면 할머니 집은 너무나도 다른 얼굴같았어. 왜 그런 가사도 있잖아.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왁자지껄한 순간이 지난 후 할머니 집이 얼마나 적막하게 변하는지 모를 거야. 사춘기였던 나는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가족들이 할머니 집에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내 모두가 가버리면 서글프기도 했어. 아마 할머니는 평생 그 적막과 함께하고 있었겠지.


아직도 할머니 집 안방 문틀에는 그맘때 내가 적어둔 글이 남아있어. ‘집에 가고 싶다’. 그 시절 나의 집이었던 할머니 집을 인정하지 못하고 마음 한쪽에 과거를 그리워하며 집을 그리고 있었던 거야. 내가 그리워하는 그 집이 반지하 집인지 옥탑방 집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할머니 집은 학창 시절의 나를 품어주지 않는 것 같았어. 사실은 내가 할머니 집을 품어주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 할머니 집에 마음 한편을 주게 된 것은 어느 가을날이었던 것 같아. 한 시간 반마다 오는 버스에서 내려 조금 경사진 길을 따라 걷는 중 살랑이는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는 수풀과 투박하게 관리된 논과 밭을 보며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아스팔트 길 위에 쌓여있는 흙 때문에 걸을 때마다 지분거리는 소리도 그날따라 기분 좋게 들렸어. 그렇게 길을 따라 할머니 집에 다다르니, 할머니가 정성스레 키운 색색의 꽃들과 활짝 열려있는 빨간 대문이 나를 맞이해 주더라. 아주 생경한 기분이 들었어. 그날 나는 문틀에 적어둔 ‘집에 가고 싶다’라는 글에 선 두 개를 지익 그었어. 그제야 할머니 집이 내 또 다른 집임을 인정할 수 있었나 봐.


사실은 알고 있었어. 아침잠이 많은 내가 지각할까 콜택시를 부르며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석 장을 쥐여주는 할머니가, 방과 후 수업으로 늦은 밤길을 혼자 걸어올 내가 걱정돼 기다리던 할머니가 얼마나 넓은 품을 내어줬는지 말이야. 그런 할머니가 그 시절 나의 엄마임을, 할머니가 있는 그 집이 그 시절 내 집임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어 후련했어. 그리고 고마웠어.


언니, 엄마가 된다는 것은 무얼까. 한 생명의 평생을 책임질 길라잡이가 된 도진 언니와, 그 시절 나의 엄마이자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를 떠올리며 생각했어. 내가 경험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막중함이 엄마라는 단어에는 포함된 것 같다고 말이야. 나를 평생토록 짝사랑하고 있다던 엄마도 그런 감정을 안고 나를 지켜봤을테지. 평생 소중히 여길 사람이 있다는 건 내가 가늠하기 힘든 애달픈 마음일 거야.


내일은 나를 평생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해야겠어. 

그리고 그 시절 나의 엄마에게도.



지은





외사촌 관계인 양도영과 양지은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도영 양지은의 브런치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거진을 구독하시고 저희가 나누는 글들을 읽어주세요. 저희가 쓰는 엄마에 관한 교환편지는 매주 한 편씩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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