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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도영 양지은 Aug 13. 2023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 가자

도영의 편지 5

그리운 지은에게,



그 사이 너의 일상이 더 안녕해졌다니 마음이 놓여. 나는 행복하고 평화롭게 지내다가도 조금은 답답하고 가끔은 우울해지기도 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어. 의식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되는 요즘이야.


이렇게 예민하고 불안해질 때면 내가 싫어하는 엄마의 성격을 내 안에서 발견하곤 해. 얼마 전에도 엄마와 통화를 마치고 엄마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 생겨도 안 좋은 부분에만 집중한다면서 투덜거렸는데, 오늘 저녁에 내가 똑같이 그러고 있는 거 있지. 감사할 일이 생겼는데 서운하고 속상한 것들만 생각하고 우울해하고 있더라. 그리고 그마저도 엄마 탓을 했어. 엄마를 보고 자라서 내가 이렇게 부정적인가 보다, 우리 가족을 닮아서 그런가 보다 하면서.


가족을 닮는 건 옛날부터 우리의 큰 두려움이었잖아. 우리가 항상 말하는 단어가 있었지. 양 씨 가문의 피, 가족력. 외할머니집 안방의 누리끼리한 장판에 앉아 대체 우리 가족의 문제가 뭘까, 우리도 크면 엄마들처럼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운명이 아닐까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었지.


지난번 써준 편지를 읽으면서 네 글을 따라 네가 살았던 집들을 떠올렸어. 내가 가봤던 곳도 있었고 가보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천장에서 물이 새는 자취방에서 너희 가족이 살던 반지하집과 옥탑방 그리고 네 꿈속의 집까지 천천히 머릿속으로 그렸지. 그리고 편지를 다 읽었을 때쯤에는 우리 어렸을 적 항상 함께 있었던, 마주 앉아 농담처럼 가족력을 이야기하던 할머니 집을 생각했어.


같은 성씨가 모여사는 작은 촌구석 마을의 입구에 위치한 초록색 대문의 우리 할머니집. 방학 때마다 가긴 했지만 그 집에서 살았던 적은 없었는데도, 왜인지 집 하면 늘 할머니집이 떠올라.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하루하루가 버겁고 숨어버리고 싶을 날이면, 버스를 타고 할머니집으로 가 동그랗게 탄 자국이 있는 노란 장판 위에 누워 푹 잠을 자고 싶었어. 그리고 다음날 뒷산에 올라 우리가 성황당이라고 믿었던 너저분한 옷들이 걸린 나무를 찾아 동전을 던지며 평화를 빌고 싶었지.



이상한 일이지. 할머니집에서 우리는 좋은 추억만큼이나 나쁜 기억을 많이 쌓았는데 말이야. 모였다 하면 싸우는 엄마와 이모들. 그만 좀 하라며 울며 소리치는 할머니. 평화로울 길 없어 보이던 어른들과 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가 될까 봐 두려워 이게 양 씨 가족의 운명이면 어쩌지 하고 농담하던 너와 나. 그렇게 밤새 들려오던 고함소리를 견디다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던 울음들까지.


어렸을 적엔 이해할 수 없었어. 만나기만 하면 싸우면서 대체 왜 할머니 집으로 모두가 모이는지. 만나지 않으면 안 그래도 힘든 인생에서 싸울 일을 하나 더는 법이니 조금이라도 편해질 텐데 왜 방학 때마다 모이고 왜 명절마다 모이는지 의문이었지. 그러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 집으로 가서 숨어버리는 상상을 계속하고 있을 때쯤 그 이유를 알게 되었어.


할머니 집의 지붕이 초가지붕에서 기와로, 기와에서 슬레이트로 그리고 다시 지금의 빨간 지붕으로 바뀌는 동안 우리의 엄마들은 아기에서 아이로, 아이에서 학생으로, 학생에서 한 명의 여성으로, 여성에서 아내로 그리고 우리의 엄마로 변했지. 그런 모든 시간을 겪었던 공간이기에 엄마들은 자꾸 할머니집으로 가고 싶었던 것 같아. 비록 할머니집에서도 싸움은 멈추지 않았고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집 속에서는 모두가 아이처럼 솔직할 수 있었으니까. 마치 내가 할머니집을 떠올리면 아무 생각 없이 즐겁기만 하던 어린 시절이 기억나 자꾸 그 집으로 도망치고 싶었듯이 말이야. 어렸던 우리의 눈에 그렇게 커 보였던 엄마들은 사실 그 작은 마을에서 벗어나 현실에 발을 붙이려 애를 쓰다가 할머니 집으로 도망쳐 온 아이였었어.


우리의 가족력이, 불행했던 우리의 유년시절과 불행했던 엄마들의 인생이 시작되었던 그 집에서 우리는 모두 어떤 것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지은아, 할머니 집에서 다 같이 까만 시골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던 그날들이 다시 올 수 있을까? 할머니가 아프신 후로 아무도 가지 않는 집이 된 그곳이 나는 아마 영원히 그리울 것 같아.


어렸던 우리를 생각하며,

 


도영





외사촌 관계인 양도영과 양지은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도영 양지은의 브런치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거진을 구독하시고 저희가 나누는 글들을 읽어주세요. 저희가 쓰는 엄마에 관한 교환편지는 매주 한 편씩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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