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설명하는 수식어
최은영 작가님의 <밝은 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채로 펼쳤다가 이 페이지에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은 어떤 수식어로 설명이나 될까 싶은 감정이었는데,
그런 그리움을 정말 수식어 없이 표현했다.
그게 진짜 내가 느끼는 감정과 꼭 같아서 눈물이 났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엄마를 간호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맞은편 침대에 87세 난 할머니가 계셨었는데, 병실 불이 꺼진 지 한참인데 잠에 쉬이 들지 못하셨다.
한참을 뒤척이시더니 한숨을 깊게 쉬셨다.
간이침대에 누워있던 간병인 분이 물었다.
"할머니, 왜 그렇게 한숨을 쉬세요. 잠이 안 오세요?"
할머니가 답했다.
그냥.. 엄마 보고 싶어서.
그때 난 두려움에 눈물이 났다. 죽음으로 향해가고 있는
엄마를 보며 벌써부터도 건강한 시절의 생기로운 엄마가 그리운데 저 나이까지도 그리움이 쌓이면 그 그리움은 얼마나 짙어질까 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현실이 되어버릴까?
나는 나이 팔십이 되어서도 한 숨 쉬며 눈물로 엄마를 그리워할까.
여전히 어린 나는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지금의 나에게 확실한 건, 단지 지금의 나는 엄마가 많이 보고 싶다는 것뿐.
추석 연휴에 고향에 다녀왔지만 엄마에게 다녀오진 못했다. 코로나 확산 예방을 위한 거리두기 방침으로 명절 연휴 내내 추모공원이 폐쇄됐다.
막상 그 공원에 가서 하는 일은 없다. 평소에도 이 시간 즈음(현재시간 오전 12시 15분) 종종 떠오르는 엄마 생각을 환한 낮에 할 뿐이다. 납골함 앞에 붙어있는 생기로운 엄마의 사진을 마주할 때 오늘만은 조금 덜 울자는 다짐을 하고, 엄마 사진 앞에서 매번 그 다짐을 무너뜨리고 오는 것이 그곳에서 하는 일의 다이다. 육성으로 "엄마, 다음에 또 올게."라고 말을 하고선 시댁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내 엄마를 추억한다.
그래도 하나의 의식이었다. 명절이 되어 시가의 친척들, 친정의 친척들 다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시댁 어른들 만났으니, 친정에도 당연히 가는 마음으로 치르는 의식이었다. 즐겁지는 못해도, 아무런 상호작용이 없어도 엄마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고 나의 안녕을 살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돌아가신 엄마를 만나러 가는 특별할 것 없는 의식이 이렇게 어려워져 버렸다. 그냥, 참, 너무 많이 보고 싶은 엄마가, 혹여나 이 시국을 알지 못하고 명절에 자기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고 서운해하면 어쩌나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본다. 서울에서 부산이라는 거리가 아이가 생기고 나니 쉽게 가지 못할 거리가 됐다는 걸 엄마가 알아주면 좋을 텐데. 고향 근처에서 살고 있는 오빠네가 추석 연휴가 끝난 이후에라도 엄마를 보고 왔다 하니 마음이 놓인다. 잠깐의 마주함으로 많은 것이 채워지는 애틋함을 알기에, 오빠도 엄마도 그 시간만큼은 먹먹하게 기뻤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 엄마에게도 어떤 수식어가 붙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본다. 우리 엄마는 어떤 엄마였더라.
웃는 입이 큰데, 웃는 입술 바로 아래 위로 자리한 고른 치열이 참 예뻤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오는 나를 데리러 매일 밤 버스 정류장까지 나올 만큼 나를 걱정하는 엄마였다.
먹는 것을 좋아해 마지막까지도 먹고 싶은 게 투성이었었다.
"실망하지 말라"는 말을 달고 살았었다. 어쩌면 그건 본인에게 하는 주문이었을 것 같다.
글쓰기를 좋아했었다.
항암치료를 받은 날에도 계모임에 참석할 만큼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었다.
이리저리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다.
쓰다보면 세 페이지쯤은 그냥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끄적이고 보니 결국 저 수식어들은 '이랬던 엄마가 보고 싶다'는 결론을 말하기 위한 '들어가는 말' 정도로 느껴진다.
그래서, 복잡다단한 감정을 응축된 단어로 풀어낼 줄 아는 소설가가 그렇게 썼나 보다.
우리 엄마는 '그냥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시간과 체력을 아깝게 여기지 말고 부모님들 곁에 모두가 잦은 빈도로 함께했으면 좋겠다. 도리상 만나러 가는 마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서로 눈을 보고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다. 마음만 먹으면 부모님을 안아볼 수 있는 크나큰 행운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