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엄마가 사준 물건들
아빠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많이 낡아서 새언니가 아빠 슬리퍼를 사 드렸다 했다.
워낙 물건을 버릴 줄 모르고, 멋도 안 부리고, 남의 시선도 신경 안 쓰는 아빠는 신발은 정말 떨어져야 버리는 물건이라 생각한다.
멀리 떨어져서 그걸 못 챙기는 딸 대신에 살가운 며느리가 그런 것까지 챙겨주니 마냥 고마웠다. 고마움 뒤에 찾아온'아빠는 또 왜 그랬을까' 싶은 생각에 전화로 잔소리를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허물없이 연락을 주고받고 속마음도 터놓는 터라, 나는 새언니에게 신발 매장에 아빠 슬리퍼 버려 버리고 오지 그랬냐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아빠는 십 년을 넘게 신었는데 떨어지지도 않는다며 슬리퍼를 집 마당에서만 신겠다며 가져가셨다 했다. 나는 딸보다 며느리가 낫다며 새언니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필요한 것들을 제때 사지 않는 아빠가 한동안 답답하고
애잔해 서럽게 울고 아빠에게 화내던 날들이 있었는데 나도 참 많이 괜찮아진 것 같다는 생각.
남들이 부인 없는 티 난다고 여길까 봐 노심초사하고 아빠 행동 하나하나에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지며 감정 컨트롤이 안 되던 때도 있었는데, 나도 어느 정도 괜찮은 걸 보니 시간이 정말 많은 걸 해결해준다는 생각.
그러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십 년 전의 아빠는 자기 치장하는 물건은 직접 사지를 않는 사람이었는데, 모든 걸 다 엄마가 사다 줬었는데, 그 슬리퍼도 엄마가 사준 거겠구나 하는 생각.
속옷도, 겉옷도, 가방도, 신발도
때 되면 바꿔주던 아내가 사라졌으니,
그걸 처음으로 사러 가는 길이 얼마나 어색하고 서글펐을까 하는 생각.
그 모든 걸 서투르지만 할 수 있게 된 데 삼 년도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많이 괜찮아진 아빠가 그냥 그 슬리퍼를 곁에 두고 싶었던 건 혹시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까지 덩달아 들었다.
새 슬리퍼가 생긴 그날, 혹시 잠자리에 누운 아빠도 나처럼 엄마 생각을 했으려나.
그러고서는 나에게서 버려지지 못하고 있는 엄마가 사 준 물건들을 하나 둘 떠올려본다.
우리 집 베란다에 놓인 우리 집 분위기와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거실용 슬리퍼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거실용 천 슬리퍼 바닥에 먼지가 잘 붙는 털뭉치가 달려있는 요상하게 생긴 슬리퍼다. 자취하던 시절, 원룸에 살던 나에게 신고 돌아다니면 자동으로 먼지를 쓸어주니 얼마나 편하고 웃기냐며 엄마가 시장에서 사다 준 슬리퍼. 시장에서 쓸데없이 귀여운 걸 보면 사고싶어지는 이상한 구석은 분명 엄마를 닮았을 거다. 결혼할 때 까지만 해도 그 슬리퍼는 그래도 봐줄만하게 낡았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못 봐줄 정도로 낡았다. 그런데 내 손을 떠나지 못하고 베란다 한 켠을 꿋꿋하게 차지하고 있다. 나도 엄마가 사준 거라고 꾸역꾸역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서 내가 뭐라고 아빠를 답답해했을까 싶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아빠에게는 엄격했다.
그러고서 다시 생각해봐도, 엄마가 사준 거실용 슬리퍼는 버리지 못하겠다.
언제쯤이면 엄마가 별 의미 없이 사다 준 물건들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날이 늦더라도 왔으면 싶다가, 영영 안 왔으면 싶기도 하다. 아빠도 이런 마음이었으려나.
너무 슬프니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단 걸
아빠한텐 비밀로 해야겠다.
엄마는 아마 하늘에서 답답해하고 있을 것 같다.
딸이고 남편이고 버릴 때 지난 물건들을 못 버리고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