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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Apr 15. 2021

지금 만나러 갑니다

운명의 짝


  “아무 걱정하지 . 우린 잘할 거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사랑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포용을 너무도 선명히 내재하고 있는 문장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가장 대표적인 대사  하나이다. 남자 주인공과의 수년 만의 재회에 여자 주인공이  품에 와락 안기며 덤덤한  조용한 흥분으로 건넨 . 거짓말을 아주 조금 보태서 말하자면 지금껏  영화를 열댓 번도 넘게 돌려보았다. 그리고  번의 예외도 없이  대사가 나오는 대목이면 영상 재생을 잠깐 멈추고는 깊은 상념에 잠기곤 했다.  번은 도대체 내가  대사에  이리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렇게 어딘가 한구석이 말끔하게 비어버린 사람처럼  연유를 찾는 데에만 골몰하다 보니, 문득 이와 같은 결론에 그리 어렵지 않게 도달할  있었다.

  나는 늘 운명 같은 사랑을 갈망해왔던 거라고. 아무리 냉랭한 현실이 내게 찬물을 끼얹고, 지인들의 따끔한 충고가 여러 차례 내 삶을 푹푹 찔러대도 그 영화 같은 사랑과 낭만을 한순간도 놓아본 적 없었던 거라고. 그래서 누군가가 내게,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이 대사처럼 말해줄 수 있게 되는 순간을 너무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이 근사한 대사 한 줌이 나의 가장 큰 결핍을 잠시나마 채워줬기 때문에, 나는 순간 손쓸 수 없는 저릿한 황홀에 정신을 빼앗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현상으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전부 엿볼 수 있게 된다. 그 속에서 그녀는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야속하게 엇갈리기만 했던 한 남자와 끝끝내 결혼을 하게 되고, 둘 사이에 기적처럼 태어난 아이와의 더없이 포근한 나날들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 영원할 것 같던 행복도 잠시, 그녀는 서른두 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 허망한 죽음을 끝으로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던 꿈에서 깨어나게 되고, 그 후 몇 달간의 고심 끝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인정하고는 남자 주인공을 무작정 찾아가게 된다. 그 농도 짙은 정직함과 간절했던 만남의 중심부에서 그녀가 남자 주인공을 세게 껴안으며 건넨 말.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말. 우린 잘할 거라는 말.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말.

  만약 나의 삶에 이와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면 어떨까. 나는 과연 내가 머지않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곳에 두고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게도 그녀처럼 미리 점쳐져 있는 운명과도 같은 사랑을 좇아 그 무모한 여정에 불쑥 발을 올려둘 용기가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새벽녘 어스름한 달빛처럼 그 분위기가 신비로운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늘 여느 사랑과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실망감을 쉬이 감추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러한 사랑에 의문을 품지 않고 교리처럼 섬기는 이들이 곳곳에 있다. 그들과 나는 서로 다른 곳에 터전을 꾸려 살아가면서,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될 사랑스러운 여름을 어린아이처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사이가 되어 한껏 붙은 채로 뿌리를 내리는 날을. 그리하여 한번 발들이면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할 숲으로 울창해져만 갈 것이다. 마치 태어난 그 순간부터 서로를 향해 쏘아진 것처럼.

  

  “기다려 주세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빨로 질겅질겅 씹어대도 끊어지지 않을 견고한 인연을 찾아 하염없이 떠도는 것만이 내 삶의 이유이자 명확한 목표이다.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사랑에게, 지금 만나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 다른 생김새와 생전 처음 맡아보는 체취와 낯선 걸음걸이로 나를 향해 다가오는 당신을 몰라보는 일만큼은 생기지 않도록. 우리가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서로의 눈동자에 적힌 인사말을 홀린 듯 읽어내기를.

  “안녕.”

  “안녕.”

  무더운 여름이고, 우리는 적당한 땀을 흘리고 있고, 작열하는 한낮의 햇빛에 눈을 게슴츠레 떴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것. 그야말로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인연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고, 전생에 무수히 많은 사랑을 나눴던 이를 다시금 만난 기적이고, 운명의 짝을 발견한 일이며, 열렬히 사랑했던 옛 시절이 기억에서 사라졌더라도 금세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시작한 일이다.

  운명이란 실재하는 분명한 형상이며, 본디  속의 믿음과 직결되는 단순함이다. 인류 최초로 운명을 믿기 시작한  또한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에 무언가 특별함을 부여하고 싶었을 테니까. 파릇한 여름과 젖은 땅과 물기가 있는 바람과 잿빛을 잔뜩 머금은 구름은 사랑에 빠지기에 가장 적합한 배경일 뿐이고,  계절 속에서 그토록 원하던 사람과 서로의 삶을 주고받기 시작했다면, 감히 운명적이라는 말을 서서히 꺼내 들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맺힌 순진무구한 사랑은 좀처럼   떨굴 생각을   것임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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